Page 40 - 고경 - 2016년 9월호 Vol.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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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한 거사에게 깨친다면 마음이 환하게 밝아짐은 물론 신하 旨)입니다.
가 왕을 요순처럼 성군의 지위에 올리는 지혜와 능력을 발휘 그런데, 이 견성 성불에 대하여 근래에 몇 가지 오해가 있
하게 된다고 강조합니다. 습니다.
우리가 본래는 부처이나 ‘내가 있다’는 착각 속에서는 마음 하나는 견성할 때 자성을 브라만교의 초월적인 자아인 아
이 좁쌀만 하나 그 착각에서 깨어나 부처로 돌아오면 마음이 트만(ātman)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남방불교를 공부하신
온 우주와 하나 되어 어디에도 집착하거나 걸림 없이 자유자 분들이 선종의 깨달음인 견성은 아트만을 깨치는 것이라 주
재하게 됩니다. 이제 나와 너, 선과 악, 생과 사, 좌와 우, 갑과 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오해입니다. 선종에서 견성
을, 부와 가난, 중생과 부처, 미망과 깨달음 등등 일체의 대립 하는 성품은 불성, 자성을 말하니 곧 중도연기, 무아를 말합
하는 양변에 집착과 분별심이 사라지고 공존과 공생, 지혜와 니다. 남방불교에서 말하는 사성제, 팔정도를 완성하는 것과
평화, 그리고 대자유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됩니다. 깨친 사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오해가 생겼는지 살펴보면
을 부처라 하고 또 영원한 대자유인이라 합니다. 선문(禪門)에서도 반성해 볼 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즉,
화두를 타파해서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은 싯다르타가 명 선문에서 견성을 ‘참나’ ‘진아(眞我)’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어
상하다 새벽별을 보고 깨쳐 부처가 된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 요. 이것이 초월적인 자아인 ‘아트만’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
은 초전법륜에서 당신이 괴로움과 쾌락의 양변을 떠나 중도 다. 그래서 참나, 진아 이런 표현은 가능하면 쓰지 말고 중도
를 깨달았노라고 중도대선언을 하셨듯이 화두 타파하여 분 연기, 무아, 공을 깨침이 견성이라 하는 것이 좋습니다.
별망상을 완전히 비워 중도세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오해는 견성성불하고도 전생의 습기나 미세망념이
남아 있어 더 닦아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선종의 견
● 견성성불에 대한 오해와 정견 성을 돈오점수로 오해한 분들의 주장인데, 견성한 뒤에 더 닦
화두를 타파해서 중도를 깨쳤다는 것은 우리 본래 마음, 을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선종의 견성이 아닙니다. 그것
즉 자성 (自性)을 보았다 하여 견성(見性)이라고도 합니다. 우 은 깨달음을 돈오점수로 보는 분들의 견해입니다. 그런데 한
리 본래 마음은 중도연기로 존재합니다. 나와 내 마음이라 할 번 생각해보십시요. 중도를 깨쳐 생로병사를 해탈한 부처님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중도연 에게 전생의 습기니 미세망념이 남아 있을까요? 부처님은 위
기라 하고 이것을 다른 말로 불성 (佛性), 자성(自性)이라 합니 없는 바른 깨달음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은 것이니
다. 화두를 타파해서 견성 성불하였다 함은 내가 실체가 없 더 닦고 깨칠 것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견성했는데, 아직
다는 것을 확연히 깨쳤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선종의 종지 (宗 뭐가 남아 있어 더 닦아야 하는 분이 있다면 아직 견성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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