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7 - 고경 - 2016년 10월호 Vol.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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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면 연기법은 불교사상의 근간이 되는 핵심이며,
불교적 사유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천태 대
사는 “부처님이 도량에 앉아 법륜을 굴리고 열반에 드신 것
이 모두 십이인연에 의거하였다.”고 했고, 성철 스님은 “십이인
연을 제외하면 불법이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에서 행하는 모든 의례에서 빠
지지 않는 『반야심경』에는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無老死
亦無老死盡.”이라는 구절이 있다. “무명도 없고 무명이 다함
도 없고, 나아가 노사도 없고 노사가 다함도 없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무명 (無明)에서 시작하여 노사(老死)로 이어지는
12연기 전체를 부정하는 내용이다. 연기설은 부처님께서 깨
달음을 얻은 뒤 하신 법문이고, 대소승의 모든 사상에서 핵 하나의 물건을 두고도 제각기 달리 보기 때문”이라고 했다.
심을 이루고 있기에 ‘연기를 보는 것이 곧 법을 보는 것’이라 동일한 구슬을 두고도 어떤 사람은 검게 보고, 어떤 사람은
고 했는데 왜 그와 같은 핵심교설을 부정하는 것일까? 이에 푸르게 보고, 어떤 사람은 노랗게 본다는 것이다.
대한 해답이 바로 오늘 살펴볼 『마하지관』에 등장한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연기법을 네 가지로 설하신 것이 아니
부처님께서 설하신 연기의 내용은 분명 하나지만 그것을 라 동일한 말씀을 하셨는데, 중생들이 받아들일 때 자신들의
바라보는 사람들의 안목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천태 대사에 근기에 따라 각기 다르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따르면 연기에 대한 이해는 네 가지 해석으로 확장된다. 천태 『대품반야경』에 따르면 “만약 십이인연법을 깊이 관한다면
대사는 부처님의 모든 교설을 내용적으로 분석하여 장교(藏 [深觀] 도량에 앉는다[坐道場].”는 구절이 있다. 누구나 십이인
敎)・통교(通敎)・별교(別敎)・원교(圓敎)로 분류했다. 부처님의 연에 대해 깊이 이해하면 그것이 곧 도량에 앉음을 의미한다
말씀은 하나이고, 그 의미도 ‘한 맛[一味]’이지만 그것을 받아 는 것이다. 여기서 ‘도량에 앉음’이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
들이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서 네 가지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룬 바로 그 자리, 즉 ‘보리좌(菩提座)’에 앉는 것을 뜻한다. 따
그렇다면 부처님의 말씀이 왜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 라서 누구나 십이인연을 깊이 관찰하고 그 의미를 바로 깨치
될까? 그 이유에 대해 성철 스님은 “중생은 눈병난 사람처럼 면 깨달음을 이룬 부처님과 같은 경지에 이르게 되고, 부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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