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9 - 고경 - 2016년 10월호 Vol.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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께서 앉으셨던 보리좌에 앉게 된다는 것이다. 다만 그 사람의 둘째, 통교(通敎)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통교는 성
그릇과 안목에 따라서 비록 자기 분상에서는 십이연기를 다 문, 연각, 보살이라는 삼승에게 공통되는 가르침을 말한다.
이해했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도달한 경지는 다음과 같이 네 앞선 장교의 이해 방식이 경전에 기록된 문자의 의미대로 생
가지로 구분된다. 과 사가 발생하고 소멸한다고 이해하는 관점이었다면 통교의
관점은 모든 번뇌의 뿌리가 되는 무명 자체가 실체 없는 공
● 연기법에 대한 네 가지 이해 (空)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생사의 원인이 되는 무명이 공하
첫째, 장교(藏敎)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장교란 초기 면 그로부터 발생하는 행도 공하고, 종국에 가서는 생도 공
불교의 경율론 삼장을 의미하는데, 장교의 관점에서 이해한 하고, 죽음도 공하게 된다.
다는 것은 경전에 기록된 문자대로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경 이렇게 경전에 기록된 연기설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지 않
전에 따르면 십이연기는 무명 (無明)에서 시작하여 행(行)과 식 고 그 실체가 공하다고 관찰하는 사람은 ‘칠보수천의좌(七寶
(識)을 거쳐 생(生)이 발생하고, 최종적으로 생으로 인해 노사 樹天衣座)’에 앉게 된다고 했다. 귀한 칠보나무에 좋은 비단으
(老死)가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고(苦)의 발생과정을 설명하는 로 꾸민 멋진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그만큼 향상됐음을 의미
유전연기의 관점에서 보면 무명으로 인해 생이 있고, 생으로 한다. 십이연기가 모두 공하다고 단언하는 『반야심경』의 내
인해 죽음이 발생하는 것이다. 반면 고의 소멸과정을 설명하 용은 바로 이런 통교의 관점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는 환멸연기의 관점에서 보면 무명이 없으면 행이 없고, 마침 하지만 이런 안목은 문자적으로 이해한 단계보다는 향상된
내 생이나 죽음도 없어진다는 설명이다. 것은 맞지만 궁극적 경지는 아니다. 모든 것이 없다는 관점에
하지만 이런 차원으로는 십이연기를 아무리 깊이 이해했다 매몰되어도 ‘있음과 없음’이라는 이분법적 차원을 벗어나지
할지라도 최종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경지는 ‘목수초좌(木樹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공이라고만 바라보면 공병 (空病)
草座)’라고 했다. 겨우 나무 위에 풀을 깔고 앉는 매우 소박한 이라는 허무주의에 빠지고 만다.
경지라는 것이다. 성철 스님은 “생멸의 견해로 십이인연을 보 셋째, 별교(別敎)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별교란 삼
면 설사 공부를 성취했다 하더라도 생멸을 벗어나지 못한다.” 승 중에 보살승만을 위해 따로 설한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보
고 덧붙이고 있다. 아무리 경전을 달달 외워도 언어와 문자로 살은 십이인연을 단지 거짓 이름 즉, ‘가명 (假名)’이라고 바라
이해하는 것으로는 생멸이라는 이분법적 변견을 벗어나지 못 본다. 보살은 무명이 생사의 뿌리이므로 그 무명을 밝히겠다
하기 때문이다. 고 수행에만 투신하지도 않고, 모든 것이 공함으로 아무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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