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2 - 고경 - 2016년 11월호 Vol.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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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戱論)이라고 한다. 즉 답도 없이 논의만 무성해지는 말씀이 면 『종경록』을 편찬한 연수 선사는 종밀을 비판하고 돈오돈
란 뜻이다. 허공꽃에 대한 논의가 희론에 해당하는 줄 아는 수(頓悟頓修)의 관점에서 선종의 수증론을 재편하였는데, 이
지혜로운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람들 앞에 나서서 ‘허공꽃이 는 위의 인용문에서 ‘무심 (無心)’을 강조하는 것과 일맥상통한
본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게 될 것이다. 다. 이 견해는 성철 선사에게도 그대로 전해진다.
이처럼 허공꽃이 본래 없는 것임을 알면, 허공꽃의 색깔과 다시 논의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지금 짧은 지면을 통해
모양을 분별하던 잘못된 생각뿐 아니라, 그것의 잘못을 가리 ‘무심’에 대해 몇 가지 얘기를 나누고 있다. 그러나 그림의 떡
키던 지혜로운 사람의 지적 역시 같이 사라지게 된다. 이와 을 아무리 보아도 배가 부르지 않은 것처럼, 문자를 통해 ‘무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이 본래는 망념이 없는 진실한 상태 심’을 얘기해도 우리 마음이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아주 자
였지만, 그런 줄 모르기 때문에 허망한 생각들이 일어나게 되 명한 이치일 것이다. 어떤 문제는 아무리 캐물어도 답이 나오
었으므로, 본래 무심한 줄 알면 허망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 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명추회
고 허망을 지적하는 진실도 함께 사라진다는 점을 위의 문답 요』 364쪽의 문답으로 이에 대한 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은 말해주고 있다.
【물음】 있고 없다는 견해를 지을 수 없다면 어떤 것
이 무심을 바르게 깨닫는 것인가?
● 갈대꽃은 물밑으로 잠긴다
【답함】 돌 호랑이 산 앞에서 싸우고, 갈대꽃은 물밑
연수 선사가 활동하던 10세기 중국 불교계는 오늘날 널리
으로 잠긴다.
퍼져 있는 간화선 (看話禪) 수행이 아직 등장하지 않은 상황이
었다. 12세기에 활동했던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 선사 말의 문이 막히고 생각의 길이 미치지 못하는 상황을 마주
이후 간화선은 선종 수행의 핵심이 되었고, 무심과도 긴밀한 하여 선사들은 시 (詩)를 남기기도 하는데, 아마 위의 문답이
관계를 맺게 되었다. 앞서 성철 선사께서 견성 (見性)하면 곧장 그런 경우일 것이다. 연수 선사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우리의
무심 (無心)해짐을 강조하신 것처럼, 화두를 참구하는 방법이 사량분별 (思量分別)을 탁 막아버렸다. 그러나 그 막힌 곳이 도
견성의 지름길이 되었다. 한편 무심의 경계에 다가서기 위해 리어 무심 (無心)으로 통하는 길일지도 모른다.
화두 참구를 강조한 것은 지눌(知訥, 1158-1210) 스님의 『법집
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에도 나타나지
만, 지눌 스님은 중국의 종밀 (宗密, 780-741) 스님의 입장에 따 박인석 ●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영명연수 『종경록』의 일심
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국대 불교학술원의 조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불
라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수증론의 기준으로 제시하였다. 반 교전서>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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