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6 - 고경 - 2017년 2월호 Vol.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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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색의 본질을 살펴보면 실                                     이어서 공이 없다. 따라서 우리가 보는 하나의 사물은 색이라

         체가 없다. 따라서 두 번째 의미는 공이 전면에 드러나고 색이                                    해도 안 되고 공이라 해도 안 된다.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니므
         뒤로 숨는다. 여기서 하나의 사물은 공이면서 또한 색이라는                                      로 색과 공이 한꺼번에 사라짐 즉, ‘구민 (俱泯)’이 된다.
         모순적 성질을 띠게 된다. 하지만 그 두 성질은 서로 충돌하지                                      이상과 같은 맥락에서 존재는 중도(中道)로 설명된다. 첫째,
         않고 공이 숨을 때 색이 드러나고, 색이 숨을 때 공이 드러나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기 때문에 색과 공이 함께 있다
         는 신비로운 작용을 한다.                                                        [俱存]. 색도 드러나고 공도 드러나기 때문에 둘 모두 드러나

           이처럼 공에도 색이 숨어 있고, 색에도 공이 들어 있다. 공                                   는 쌍조(雙照)가 성립된다. 동시에 색도 없고, 공도 없는 것[俱
         이 있을 때 색이 있고, 색이 있을 때 공도 있다. 우리는 사물                                   泯]이 공이므로 공은 색과 공을 모두 부정하는 쌍차(雙遮)도
         을 볼 때 색만을 보지만 그 속에는 두 속성이 함께 있다. 결국                                   된다. 결국 진공은 색과 공이 함께 사라지고 함께 존재하는

         존재는 공과 색이라는 모순적 성품이 공존함으로 있는 것도                                       쌍민쌍존(雙泯雙存)이고 쌍차쌍조(雙遮雙照)가 된다. 공의 관점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중도적 성질을 띠게 된다. 그러므로 색                                    에서 존재를 설명하면 진공(眞空)이 되고, 색의 관점에서 설명
         과 공은 서로 모순적이지만 대립 모순된 색과 공이 서로의 존                                     하면 묘유(妙有)가 된다. 삼라만상이라는 색 속에 공이 있고,
         재를 비추는(雙照) 관계에 있다. 이것이 공의 세 번째 의미인                                    개체의 무실체성이라는 공 속에 무수한 관계를 통해 색이 있
         색과 공이 함께 존재하는 ‘구존(俱存)’이다.                                             기 때문이다.

           색이 숨고 공이 드러나든, 공이 숨고 색이 드러나든 숨는
         것이 곧 드러나는 것이고, 드러나는 것이 곧 숨는 것이다[隱顯
         無二]. 모든 존재의 근본적 성품은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

         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펼쳐져 있는 색은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를 ‘환색 (幻色)’이라고 한다. 우리
         가 보는 색은 환영일 뿐이며 진짜 모습은 공이기 때문이다.
           진공의 네 번째 의미는 ‘자기와 남이 함께 사라짐 [自他俱泯]’
         이다. 색이 곧 공이기 때문에 색이라 할 수도 없고, 공이 곧 색
                                                                               서재영    _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
         이기 때문에 공이라 할 수도 없다. 공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등을 거쳐
                                                                               현재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것이 공이어서 색이 없고, 색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이 색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 고경                                           2017. 02.                                                                34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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