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3 - 고경 - 2017년 3월호 Vol.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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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도 고(苦)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가르침으로 읽을 필요가 있  는 화엄사상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지난 호에서 살

 다. 공을 그런 관점에서 읽으면 나와 대상에 대한 집착과 번뇌  펴본 바와 같이 현수법장은 참다운 공의 의미를 네 가지로 설
 를 해소하고 마음의 평화를 주는 가르침임을 알 수 있다.  명했다. 첫째는 자기를 버리고 남을 이루는 것이고, 둘째는 남
 첫째, 공의 이치를 알면 집착과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을 숨기고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며, 셋째는 나와 남이 함께 드
 자신과 대상에 대해 집착하는 것은 그것이 실체가 있고 영원  러나는 것이고, 넷째는 나와 남이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이들
 할 것이라는 어리석은 믿음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자아와 대상  내용을 곰곰이 음미해 보면 남을 어떻게 바라보고 행동해야

 에 대한 그릇된 이해와 집착에서 가장 큰 번뇌와 고통이 비롯  하는가에 대한 지혜를 얻을 수 있다.
 된다. 따라서 모든 개체의 실체가 텅 빈 것임을 깨닫게 되면   첫째 ‘폐기성타(廢己成他)’이다. 자신은 뒤로 숨고 남을 먼저
 자아와 대상에 대한 강고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루라는 것이다. 우리는 늘 나를 앞세우며 산다. 이익이 있을

 둘째, 공은 단지 모든 것이 텅 비었다는 가르침이 아니다.   때도 내가 먼저이고, 명예 앞에서도 내가 먼저이다. 도덕과 윤
 공은 곧 연기이므로 모든 존재는 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가르  리 때문에 그런 속내를 숨기고 있을 뿐이다.
 침이기도 하다. 공에 입각해 보면 나와 너를 구분 짓는 경계  이런 심리는 개인적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다. 최근 트럼프
 가 해체된다. ‘나’라는 경계가 허물어질 때 무수한 타자들을   미국 대통령은 아메리칸 퍼스트를 외치며 노골적으로 미국
 발견하게 된다. 나는 그들과의 관계 속에 존재함으로 자기중  먼저를 외치고 있다. 어떤 힘센 사람이 자기만을 외치며 군림

 심적 사유에서 벗어나게 된다.  하면 수많은 피해자들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반대로 서로가
 셋째, 공을 이해하면 나와 나 밖에 있는 존재들이 나와 다  자기 먼저를 주장하면 온 세상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이리와
 르지 않다는 ‘자타불이 (自他不二)’를 깨닫게 된다. 나와 남을   같은 관계가 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온통 미 퍼

 나누는 경계가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타자에 대한 연  스트(Me First)를 외치고, 좋은 것은 자신이 먼저 하겠다는 사
 민과 모두가 한 몸이라는 자비심이 나오고, 더불어 살고자 하  람들로 가득 차 있다.
 는 공존의 가치관이 형성된다.  나를 내세우며 자신이 먼저 하겠다는 것은 나와 남은 다르
          다는 생각에 근거해 있다. 공사상은 바로 그와 같은 무지를
 진공의 네 가지 의미와 마음의 평화  일깨운다. 비록 색이 전면에 드러나고 공이 뒤에 숨어 있어도

 이처럼 공에 대한 이해는 집착의 해소와 불이와 공존의 인  [色現空隱] 결국에는 공이 드러나게 된다. 색이 공과 다르지 않
 식을 열어준다. 그런데 사람관계에 적용할 수 있는 공의 지혜  기 때문이다[色不異空]. 내가 일등이 되고 싶고, 내가 앞서고



 ● 고경  2017. 03.                                            3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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