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4 - 고경 - 2017년 6월호 Vol.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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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을 알면 공이 드러난다 구 역시 처음부터 존재했던 불변의 실체가 아니다. 강도, 대지
진공의 네 가지 의미 중에 첫째는 회색귀공관(會色歸空觀)이 도, 태양도, 바람도 그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란 없다. 지구를
다. 색을 모아 공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색 (色)이란 삼라만 포함해 모든 존재들은 우주적 관계의 산물이자 끊임없이 변
상의 모습으로 눈앞에 펼쳐져 있는 현상적 존재들을 말한다. 해가는 과정이다.
우리들은 육안(肉眼)으로 눈앞에 펼쳐진 존재를 보고 객관적 이렇게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진 대상이자 물질인 색 (色)을
으로 있는 실재라고 받아들인다. 우리가 현상적 존재들을 실 하나씩 따져보고, 색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회색 (會
재한다고 믿는 근거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주는 분별의식이 色)’ 즉 ‘색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다. 색을 바로 이해하면 결국
다. 하지만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인지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모든 존재들은 실체가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데, 그것이 ‘귀
실재는 아니다. 감각기관이 보는 세계는 마치 VR 헤드셋을 쓰 공(歸空)’ 즉 ‘공으로 돌아감’이다. 따라서 ‘회색귀공’이란 색의
고 체험하는 가상현실 (Virtual Reality)과 유사한 것이다. 가상 실상을 깊이 알면 색의 본질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현실은 분명히 가짜임에도 불구하고 감각은 그것을 실재보다 공이라는 것이다.
더욱 실재 같이 받아들인다. 둘째는 명공즉색관(明空卽色觀)이다. 공의 의미를 밝혀보면
그렇다면 감각의 눈이 아니라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보는 공이 곧 색이라는 뜻이다. 공은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것이 아
법안(法眼)으로 보면 어떻게 될까? 법안으로 보면 실재라고 생 니다. 공의 의미를 깊이 밝혀보면 ‘공즉시색 (空卽是色)’, 즉 공
각했던 현상들이 마치 가상현실과 같이 실체 없는 것임을 깨 은 텅 빈 허공이 아니라 곧 물질 [色]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닫게 된다. 눈, 귀, 코, 혀, 몸, 의식이라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 법안으로 보면 모든 존재는 개별적 존재의 실체가 없다. 그럼
은 밖으로 존재하는 빛, 소리, 향기, 맛, 촉감, 사물을 보면서 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눈앞에는 무수한 존재들이 펼쳐져
실재하는 것이라고 분별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여섯 가지 감 있다. 연기적 관계 속에서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고, 한
각기관[六根]이 여섯 가지 대상[六境]을 만나 생성시킨 일종의 송이의 꽃이 피어나고 있다. 그런 관계성은 빗물과 토양 속의
가상적 이미지일 뿐 존재의 실상 자체는 아니다. 자양분과 같은 직접적 관계는 물론 바람과 구름처럼 대기의
『반야심경』에서는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고 했다. 나를 구 순환과 태양과 별과 같은 우주적 에너지의 관계로 확장된다.
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가 모두 공하다는 것이다. 색이 공함으 결국 진공에서 말하는 공이란 개체적 존재의 허구를 밝히
로 강이나 대지, 태양이나 바람 같은 것들도 고정불변하는 실 는 동시에 존재의 우주적 관계성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개
체가 아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모든 생명의 삶의 터전인 지 별적 존재를 있게 만드는 ‘관계의 맥락’이 곧 진공의 의미인
● 고경 2017. 06. 32 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