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0 - 고경 - 2017년 9월호 Vol.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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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가 가라앉지는 않았으나 보복하지 않는다[力忍].                                    욕감은 상당했다. 집에서 오빠에게 맞은 것과는 전혀 다른 차

             2.  아량으로 상대를 용납하고 없는 듯이 욕된 곳에 처한                                  원의 맛이었다. 바깥에서 상처를 받으면 집구석으로 퇴각하
               다[忘忍].                                                          는 게 인지상정인지라, 집으로 달려와 엄마를 보자마자 울면
             3. 돌이켜 자기를 꾸짖고 남을 탓하지 않는다[反忍].                                    서 일러바쳤다. 그러나 엄마는 내 손을 잡고 때린 아이 집으
             4. 안팎으로 나와 남이 모두 꿈같은 줄 통달한다[觀忍].                                  로 따지러 가기는커녕, 등신같이 맞고 들어왔다며 나를 나무
             5. 나의 참는 힘이 성취되었음을 기뻐한다[喜忍].                                      라셨다. 맞은 것도 속상한데, 나를 위로하고 대신 싸웠어야할

             6.  상대의 어리석음에 연민을 느껴 제도하겠다고 발원한                                   엄마가 그런 식으로 나온 게 더 충격이었다. 세상 믿을 사람
               다[慈忍].                                                          하나 없다는 아픈 교훈을 얻었을 뿐이다. 다만 이제 와서 엄
                                                                               마의 나무람을 억지로라도 좋게 해석해보자면, “네 문제는 네

           앞의 두 경에 비해 단계별로 시설된 자상한 가르침이다. 그                                    가 알아서, 참지 말고 즉시 대응하라”는 가르침이 아니었을까
         러나 현실 속에서 맞닥뜨리는 사건에 적용하기엔 너무 높아서                                      한다. 그래야 앞으로 살아갈 험한 세상으로부터 자기를 지킬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근기 박약한 나 같은 중생은                                      수 있을 테니까.
         첫 단계부터 딱 막힌다. 화가 가라앉지 않는 건 물론이고, 보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렇게 살지 못했다. 속절없이 당하고
         복하지 않고 참으려니 힘이 든다. 보복할 마음이 없는 게 아니                                    할 수 없이 참은 일들이 훨씬 많다. 특히나 모욕은, 참기도 어

         라, 다만 보복할 힘이 없고 뒷감당 안 돼서 보복하지 못할 뿐                                    렵지만 잊기는 더 어렵다. 당한 것도 속 쓰린데, 당했을 때 적
         이다. 두 번째도 그렇다. 당한 주제에 상대방을 용납할 아량이                                    절히 대응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욱 견딜 수 없게 만든다.
         있다면 그건 기만이다. 자기 탓으로 돌리는 세 번째 단계는 잠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자기를 들들 볶으면서 ‘참지 말고 그때 이

         시 편리한 방책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잘 녹이지 못했을 때는                                    렇게 해줬어야 하는 건데’를 복기한다. 처리되지 못한 울분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내내 마음을 괴롭힌다. 네 번째 단계부                                     번뇌를 더해 복수를 꿈꾼다. 처음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터는 공(空)을 터득한 보살의 경계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시작한 상상이 어느새 ‘눈에는 심장, 이에는 간’이 된다. 그럴
           당하고 갚아주지 못한 기억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을 끄집어                                     수록 점점 자괴감만 깊어간다.
         내자면 이런 일이 있었다. 어렸을 적에 다른 아이에게 맞고 들                                      사람들은 어떻게 참고 사는지 궁금하다. 지위가 낮고 힘

         어온 날이 있었다. 나는 원래 몸집이 작고 말라서 누가 봐도                                     이 약할수록 당할 일이 많고, 당하고도 가만있으면 또 당하
         만만한 먹잇감이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맞을 때의 굴                                    는 것이 실제 세상이다. 그래서 경전의 고매한 말씀보다 “참으



         ● 고경                                           2017. 09.                                                                58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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