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6 - 고경 - 2017년 9월호 Vol.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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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가서 황미(黃米)를 사가지고 왔습니다.”                                         不食]”는 명언을 남긴 백장이다. 그는 철저하게 주체적이고 이

           임제가 다시 물었다.                                                         성적인 불교를 지향했다. 법당에 불상을 따로 두지 않는 것도
           “살 것은 다 샀느냐?”                                                       백장이 만든 선가(禪家)의 전통이다. 도(道)에 밝은 주지와 그
           “다 샀습니다.”                                                           의 법문이 부처님을 대체한 것이다.
           임제가 돌연 주장자로 땅에 줄을 그었다.                                                종교적 상징이 아닌 살아있는 인간이 곧 부처였다는 사실
           “이것도 샀느냐?”                                                          에서, 공부의 됨됨이를 점검하는 법거량(法擧量)이 활성화되었

           원주가 갑자기 “할!” 하고 소리를 질렀다. 임제는 주장자로 그                                 었음을 알 수 있다. 원주는 절일이 바빠서 도통 마음공부를
           의 머리통을 때렸다. 이 소동을 듣고 이번엔 전좌(典座)가 와서                                 할 겨를이 없는 소임이다. 부처를 돈 주고 사올 줄은 알아도
           임제에게 말했다.                                                           부처를 제 힘으로 얻을 줄은 모른다. 스승이 유행어처럼 밥

           “원주는 화상의 뜻을 모릅니다.”                                                  먹듯이 던지던 ‘할’을 흉내낼 따름이다. 전좌는 맞기가 싫어서
           임제가 전좌에게 물었다.                                                       굴복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이것도 답이 아니었다. 사실 ‘도’라
           “그러면 그대는 뜻을 알았는가?”                                                  는 게 ‘알고 모름’의 문제가 아니다. 인생을 안다고 해서 인생
           전좌가 문득 임제에게 절을 했다. 임제는 그도 때렸다.                                      이 술술 잘 풀리던가? 다만 맞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커갈 뿐.

           안거(安居) 철이 되면 커다란 대중방 벽에 큼지막한 용상방
         (龍象榜)이 붙는다. 3개월 동안 해야 할 각자의 임무를 적어놓
         은 명부다. 철저한 분업이 이채롭다. 전좌(典座)는 별좌(別座)라

         고도 한다. 대중이 참선하면서 앉는 좌복을 비롯해 침구와 식
         재료를 관리한다. 원주(院主)는 절 살림 전체를 총괄하는 소임
         이다.
           ‘주지(住持)’라는 단어는 중국 당나라 백장회해(百丈懷海,                                    장웅연    _ 집필노동자.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조사선(祖師禪)에 관
                                                                               한 수업을 몇 개 들으며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2002년부터 불교계에서 일하고 있다. ‘불교신
         749-814) 선사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땅에 오래
                                                                               문 장영섭 기자’가 그다. 본명과 필명으로 『길 위의 절(2009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
         머무르며 불법 (佛法)을 수호한다는 ‘구주호지(久住護持)’의 준                                   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선문답』, 『불행하라 오로지 달마처럼』, 『눈부시지만, 가짜』,
                                                                               『공부하지 마라-선사들의 공부법』, 『떠나면 그만인데』, 『그냥, 살라』 등의 책을 냈다. 최근작
         말이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                                    은 『불교에 관한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물음 49』.



         ● 고경                                           2017. 09.                                                                54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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