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1 - 고경 - 2017년 10월호 Vol.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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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어록의 뒷골목
한 역학관계로 읽힌다. 애써 구하는 자가 더 망가지는 법이다.
본디 더 사랑하는 자가 약자일 수밖에 없어서, 꼿꼿하고 무
등 뒤에서 누군가 정한 도인송은 역사에 이름을 남긴 큰스님이지만, 미인송은
내 이름을 부를 때 부용(연꽃)이란 상징으로만 떠돈다. 착한 사람일수록, 자살하
기 쉽다.
환성은 벽송사를 중창한 인물이다. 그가 벽송사로 오기
글 : 장웅연
300년 전쯤에 벽송지엄 (碧松智嚴)과 벽계정심(碧溪正心)이 예
서 살았다. 벽송사의 창건주는 벽송지엄이고 도인송에는 환성
지안 말고도 벽송과 관련된 또 다른 고사가 존재한다. 벽송지
엄은 조선 초기 대대적인 불교탄압을 피해 지리산으로 숨어
들었다. 지리산에 도인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벽송지엄이 벽
경남 함양에 있는 벽송사는 미인송(美人松)과 도인송(道人 계정심을 물어물어 찾아왔다. 어른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松)으로 유명하다. 45도로 구부러진 소나무가 미인송이요 옆 있으리란 믿음으로 극진히 시봉했다. 하지만 스승은 아무리
에 있는 그보다 작은 소나무는 도인송이다. 도인송을 향해서 봐도 평범했다. 야밤에 잠깐 좌선을 한다는 점 빼고는 허접한
휘어 있는 미인송은 조선 후기 이름난 스님이었던 환성지안 장삼이사의 일상과 다를 바가 없었다.
(喚惺志安, 1664~1729)을 흠모했던 부용(芙蓉)낭자의 후신이란 광주리를 만들어 시장에 팔면서 꼬박 3년 동안 노인네를
전설이다. 그녀는 원래 환성의 품에 한번 안기려고 일껏 애썼 먹여 살리던 청년은 끝내 지쳤다. ‘내가 허송세월을 했구나.’
다. 그러나 그의 일관되고 출중한 금욕에 감복해 욕정을 뉘 움막을 박차고 나와 내내 씩씩거리면서 개울 위 징검다리를
우친 뒤 스승으로 삼아 함께 열심히 정진했다는 야사가 내려 건너던 순간이었다. “지엄아!” 스승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온다. 벽계는 두 팔을 번쩍 쳐들고 목이 터져라 외쳤다. “지엄아! 법
특정한 각도에서 보면 미인송이 마치 도인송을 행여 비라 (法) 받아라아아아아!” 순식간에 부처가 되어버린 벽송은 도
도 맞을까 보호해주는 모양새다. 뿌리는 단단히 박혀 있으나 인송 밑에 좌선대를 설치했다. 아직도 있다.
도인송 쪽으로 한껏 기울어 있는 몸통은 관능적이다. 어쩔 활자로 박히거나 앞에서 호명되는 내 이름은 이해타산을
수 없는 인간의 오욕칠정 또는 연애가 가진 비루하고도 애틋 위해서만 사용된다. 말하게 하고 일하게 하고 숙이게 한다. 돈
● 고경 2017. 10. 48 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