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2 - 고경 - 2018년 1월호 Vol.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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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는 ‘은현문(隱顯門)’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바위에 부딪친                                               러난다. 한 송이 국화가 피기 위해서는 소쩍새의 울음소리로
           하얀 파도가 검푸른 바닷물로 합쳐질 때는 하얀 파도의 특성                                                  대변되는 아득한 시간이 개입하고, 천둥과 먹구름으로 대변되
           은 숨고[隱], 검푸른 바닷물이 드러난다[賢]. 반면 거친 바람에                                              는 우주의 질서가 개입한다. 대기의 흐름은 먹구름을 몰고 오

           출렁이던 바닷물이 바위에 부딪쳐 하얀 포말을 일으키면 바닷                                                  고, 햇살은 바닷물을 증발시켜 수증기를 만들고, 바람은 수증
           물은 숨고[隱] 새하얀 파도가 드러나게 된다[顯]. 이렇게 하나                                               기를 모아 먹구름을 만들고, 먹구름은 비가 되어 대지를 적신
           의 존재는 드러남이 있으면 반대로 숨는 것이 동시적으로 존재                                                 다. 작년에 떨어진 꽃잎과 나뭇잎은 미생물의 활동으로 해체되

           한다.                                                                               어 자양분이 되고 국화의 줄기가 되고 꽃잎이 된다. 한 송이 국
             파도가 바닷물을 움켜쥘 때는 바닷물이 보이지 않고, 바닷                                                 화는 이 모든 작용의 종합적 결과로 존재한다.
           물이 파도를 움켜쥘 때는 파도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보이                                                   따라서 우리가 보는 한 송이 국화는 단지 눈앞에 있는 한

           는 측면은 보이지 않는 측면을 동시에 움켜쥐고 있기 때문에                                                  송이 개별적 꽃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한 송이 국화의 이면에
           파도에도 바닷물이 있고, 바닷물에도 파도가 있음을 의미한다.                                                 는 온 우주가 비밀스럽게 숨어 있다. 드러나지 않고 숨어 있는

           이렇게 하나의 존재는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드러난 부                                                  무수한 존재들의 연기적 작용으로 한 송이 국화가 피어난 것이
           분과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 비밀스럽게 동시에 작용하는 것이                                                  다. 만약 무수한 시간들이 숨지 않고 과거의 시간이 드러나 있
           ‘비밀은현구성문’이다.                                                                      다면 현재의 국화는 없다. 작년에 떨어진 꽃잎과 나뭇잎이 비

             ‘숨음[隱]’과 ‘드러남[顯]’이 함께 이루어진다는 것은 숨는다                                             밀스럽게 숨지 않고 드러나면 화단에는 국화 대신 쓰레기만
           고 해서 숨음만 있고 드러남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숨                                                가득할 것이다.
           음이 곧 드러남이고, 드러남이 곧 숨음이다. ‘은현구성’이란 숨                                                 결국 눈앞에 핀 꽃은 고립적 개체의 드러남이 아니라 온 우

           음과 드러남이 동시적으로 있다는 ‘은현동시’의 특성을 말한                                                  주적 관계성이 비밀스럽게 드러난 것이다. 따라서 우주적 존재
           다. 이상과 같이 상입문(相入門), 상즉문(相卽門), 은현문(隱顯門)                                            들이 뒤로 숨어야 비로소 하나의 개체가 앞으로 드러날 수 있

           이라는 세 개의 문은 모든 존재가 서로에게 침투하고, 서로에                                                 다. 햇살이 드러나고, 시간이 드러나고, 박테리아들이 드러나
           게 의지하고, 때로는 이것이 드러나고, 때로는 저것이 드러나는                                                면 국화는 없다. 따라서 그들이 숨는 것이 곧 국화를 드러나게
           존재의 관계적 실상과 중도적 특징을 설명하는 교설이다.                                                    하는 것이고, 국화가 드러나는 것이 그들이 숨는 것이다. 숨는

             한 송이 꽃이 피고 지는 것을 통해서 이런 이치는 여실히 드                                               것에 드러남이 포함되어 있고, 드러남에 숨음이 포함되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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