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2 - 고경 - 2018년 1월호 Vol.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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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들리는 이 얘기에 크게 깨달았다. 을 날리던 경허가 돌연 책들을 죄다 불태우고 폐관에 든 까닭
= 맹수가 되기로 작심한 개가 스스로 먹잇감을 찾아 나선다. 은, 고작 소나 되려고 했던 자신에 대한 모멸감 때문으로 유추
된다. 염병이 도는 마을에서 시체더미를 목격한 그는, 죽음의
코에 고삐가 걸린 소들은 주인의 말을 잘 듣는다. 그래야 잘 게걸스러운 전지전능성에 압도됐다. 죽음은 몹시 청렴해서, 억
산다. 고삐의 주인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줘야만, 목숨과 안전 만금을 쥐어줘도 발길을 되돌릴 수 없다. 하물며 언변과 학식
을 장담할 수 있다. 인간의 탈을 쓴 소들도 집소들의 법칙을 따 으로는 저승사자를 구워삶지는 못한다. 그는 뇌물로 오로지 쇠
른다. 열심히 일하고, 착한 일도 열심히 하고, 자식 잘 키우고, 고기만 받는다.
살림도 늘리면서, 건실한 마소가 되어간다. 산마루에서 한가롭
게 풀을 뜯고 있는 소떼와 펜션 앞마당에서 오순도순 식사를 천만고의 영웅호걸 북망산의 무덤이요
즐기는 중산층 가족은, 등가(等價)다. 부귀문장 쓸데없다 황천객을 면할쏘냐. …
나의 몸이 허공과 같은 줄로 진실히 생각하여
고삐 풀린 망아지들은 머지않아 굶어죽거나 잡아먹힌다. 당 팔풍오욕 일체경계 부동한 이 마음을 태산같이 써나가세.
장에만 즐겁거나 혼자서만 즐겁다. 공동선은 다수가 공동체의 - 경허성우(鏡虛惺牛, 1849~1912), <참선곡(參禪曲)> 일부
규약과 관습에 묵묵히 휘말려 들어가는 일에서 달성된다. 집단
이 원하지 않는 개인의 재능은 죄악이거나 무능이다. 자기다움 견성(見性)이 발생한 때는 1879년 음력 11월 15일이다. 3년
을 포기하고 감춘 대가로써만 인간다운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전인 1876년에 강화도조약으로 개항이 이뤄졌다. 일본 진종(眞
것이다. 사실 세상의 존경을 두루 받는다는 건, 세상의 억압을 宗) 계열 본원사(本願寺)가 부산항 근처에 별원(別院)을 세운 게
일정하게 받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억압한 만큼 권리 1877년이다. 한국불교 식민지화의 효시로 본다. 물론 500년
와 명예가 따라온다. ‘자기관리’라는 가치는 아름답지만 피곤하 간 이어진 숭유억불의 국시 (國是)로 인해 한국불교는 모국 안
다. 그래서 이목(耳目)의 노예들일수록, 잔소리와 ‘갑질’이 심하다. 에서도 식민지였다. 민간신앙 수준이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튼실하고 유능한 소라 하여도, 소로서의 <참선곡>의 저술 시기는 구한말로 짐작된다. 한글 가사(歌詞)
삶의 끝은 끝내 주검이거나 쇠고기다. 최고의 학승으로 이름 는 당시 민중을 계몽할 목적으로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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