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1 - 고경 - 2018년 6월호 Vol.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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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여광은 본래 구자국에 머물고 싶어 했다. 송의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이 1084년 편찬한 『자치통감(資治通鑑)』 권제106
 진기 (晉紀) 28에 관련 기록이 전한다. “구자국이 풍족하고 안락하기에 여

 광은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생각이었다. 천축 사문 구마라집이 여
 광에게 말했다. ‘여기는 흉조와 망조가 든 땅입니다. 오랫동안 머물기엔 적

 합하지 않습니다. 장군은 동쪽으로 회군하다 보면 중간에 유복한 땅을 만
 날 것인데, 거기에 머무르면 됩니다.’ 이에 여광은 여러 장수들을 불러 큰

 잔치를 열고 머무를 것인지 회군할 것인지를 토론하게 했다. 모든 이들이
 돌아가고 싶어했다. 2만 마리의 낙타에 서역의 보배들을 싣고 1만여 마리

 8)
 의 준마를 몰아 동쪽을 향해 회군했다.”
 구마라집이 조국을 “흉조와 망조가 깃든 땅”이라고 말한 이유는 외국

 군대가 자기 나라에 오래 머무는 것이 싫은 것 외에도, 장안에 들어가 불
 교를 포교하고픈 생각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해 『고승전』 「구마라집전」에

 눈에 띄는 기록이 있다. “구마라집의 어머니가 인도로 돌아가면서 그에
 게 말했다. ‘대승의 심오한 가르침을 마땅히 진단(중국)에 크게 알려야 한

 다. 동토에 그 가르침을 전하는 것은 오직 너의 힘에 달렸다. 다만 너 자신
 에겐 그것이 이익이 없다. 어떻게 할 것이냐?’ 구마라집이 대답했다. ‘대승

 보살의 가르침은 자신의 몸을 버려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 가르침을 널리 전파해 몽매한 습속을 씻어 없애고 깨닫게 할 수 있다
                                                           ―
 면, 모름지기 저의 몸이 난로와 가마솥에 들어가 태워지고 삼기는 고통을
                                     서안 초당사에 있는 구마라집의 사리탑
 당해도 원한이 없을 것입니다.’ 이에 구마라집은 구자국의 신사에 머물렀



 8)   “呂光以龜玆饒樂, 欲留居之. 天竺沙門鳩摩羅什謂光曰: ‘此凶亡之地, 不足留也; 將軍但東歸,
 中道自有福地可居.’ 光乃大饗將士, 議進止, 衆皆欲還. 乃以駝二萬餘頭載外國珍寶奇翫, 驅
 駿馬萬餘匹而還.” [北宋]司馬光 編撰, 『자치통감신주(資治通鑑新注)』第4冊, 西安:陝西人民出
 版社, 1998, p.3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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