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3 - 고경 - 2018년 6월호 Vol.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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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여광이 죽은 후 서자(庶子) 여찬(呂纂, ?~399~401)이 형제 여소(呂紹)를   로소 귀의할 곳을 찾았다.”며 출가했다. 타고난 총명으로 대승의 여러 경전
 죽이고 왕위를 찬탈·계승했어도 사정은 변하지 않았다. 후진의 2대 왕 요  과 율장·논장을 두루 섭렵했고, 20세쯤엔 이미 관중지방(지금의 섬서성) 일
 흥(姚興, 366~394~416)이 여찬을 격퇴하기까지 무려 18년 동안, 구마라집  대에 이름을 드날렸다. 명성이 높아지자 시기심 많고 논쟁을 좋아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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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 양주에서 중국의 말과 문자를 배우며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리들이 양식까지 짊어지고 찾아와 도전했다. 그러나 승조의 예리한 논변
 큰일을 이루기 위해선 준비기간이 필요했던 것이리라.   에 상대방이 격퇴되는 것이 정해진 결론이었고, 승조의 명성을 올려주는

 구마라집이 후진 (後秦)에 들어오기 전인 384년 장(張) 씨 성을 가진 장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역할이었다. 후일 구마라집이 고장에 있다
 안의 한 빈한한 집에 아이가 태어났다. 승조다. 생계를 위해 승조는 다른   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스스로 찾아가 그를 스승으로 모셨고, 구마라집 또

 사람을 대신해 글을 써주는 일을 했다. 책을 베껴 써 주는 일을 하다 여러   한 승조를 지극히 아꼈다. 그러다 401년 스승을 따라 다시 고향 장안으로
 경서들을 두루 읽었다. 그는 노자와 장자 관련 서적에 특히 관심이 많았  돌아왔다. 11)

 다. 일찍이 『노자』를 읽은 뒤 “아름답긴 아름다우나, 정신을 의지하고 세속  우여곡절 끝에 장안에 온 구마라집은 401년부터 405년까지 후진왕 요
 의 번뇌를 잠재우는 방법이 되기에는 오히려 부족함이 있다.”고 탄식했다.   흥의 별장격인 궁사(宮寺, 소요원)에 머물렀다. 406년부터 413년까지는 초당

 그러던 어느 날 삼국시대 (220~280) 손권이 세운 오나라에서 활동한 지겸  사(草堂寺, 大石寺·大寺라고도 함)에 주석했다. 장안에 도착한 구마라집을 요
 이 번역한 『유마경』을 읽고는 머리로 그 책을 받들며 기뻐했다. 그리곤 “비  흥은 어떻게 대우했을까? 『자치통감(資治通鑑)』 권제114 진기(晉紀) 36에

            당시 상황을 전해주는 기록이 있다. “후진왕 요흥은 구마라집을 국사로 삼
 9)   “什母臨去謂什曰: ‘方等深教, 應大闡真丹, 傳之東土, 唯爾之力. 但於自身無利, 其可如何?’   아, 마치 신을 섬기듯이 존경했다. 친히 여러 대신들 및 스님들과 함께 구
 什曰: ‘大士之道, 利彼忘軀. 若必使大化流傳, 能洗悟矇俗, 雖復身當爐鑊, 苦而無恨.’ 於是
 留住龜茲止于新寺.” [南朝梁]慧皎 著·湯用彤 校注, 『고승전(高僧傳)』, 北京:中華書局, 1992,   마라집의 경전 강의를 들었다. 또한 서역에서 들어온 경전과 논서 삼백여
 p.48.
 10)   이에 대해 승조는 『조론』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인도 출신의 사문 구마라집은 어려서 대승  권을 번역하도록 구마라집에게 말했다. 대량의 탑과 절을 지었으며, 그곳
 의 여러 경전들을 연구했고, 반야학의 깊은 뜻을 파헤쳤다. 언어문자의 표면적 의미를 홀로   에서 수행하는 출가자의 수가 항상 천 명 이상을 웃돌았다. 조정의 대소신
 넘어서고, 보고 듣는 수준을 뛰어넘는 현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인도 여러 나라의 그릇된 학
 설들을 평정했을 뿐 아니라, 중국에까지 진실한 반야지혜의 바람을 불어오게 했다. 진리의   료들도 모두 불교를 믿었다. 이로 인해 모든 지방에 불교를 믿는 분위기가
 불을 다른 지방에 옮기고자 노력하다 양주에서 빛을 감추고 있었는데, 이는 진리를 전파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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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는 당연히 시절인연에 부응해야 하고, 시절인연의 도래에는 반드시 연유가 있어야 하기 때  퍼졌으며, 열에 아홉은 불교를 믿었다.”
 문이다. 홍시3년 (401) 음력12월 후진이 구마라집의 입국을 준비하고 군사를 일으켜 그를 장
 안에 모셔왔는데, 이는 하늘의 뜻이자, 운명이 그러했다.(有天竺沙門鳩摩羅什者, 少踐大方, 研機
 斯趣, 獨拔於言象之表, 妙契於希夷之境, 齊異學於迦夷, 揚湻風於東扇. 將爰燭殊方而匿耀涼土者, 所以
 道不虛應, 應必有由矣. 弘始三年, 歲次星紀, 秦乘入國之謀, 舉師以來之. 意也. 北天之運數其然也.)” 『가  11)   [南朝梁]慧皎 著·湯用彤 校注, 『고승전(高僧傳)』, 北京:中華書局, 1992, pp.248~249.
 흥대장경(嘉興大藏經)(影印本)』第20冊, 臺北:新文豊出版社, p.262c. 이하 『가흥대장경(嘉興大  12)   “秦王興以鳩摩羅什爲國師, 奉之如神, 親帥群臣及沙門聽羅什講佛經, 又命羅什飜譯經 論
                                                                        ㆍ
 藏經)(影印本)』에서 인용할 때는 J로 표기한다. 예를 들면 J.20, p.262c. 페이지 뒤의 a, b, c는   三百餘卷, 大營塔寺, 沙門坐禪者常以千數. 公卿以下皆奉佛, 由是州郡化之, 事佛者十室而
 해당 페이지의 상단, 중단, 하단을 의미한다. 한편, 『조론』은 1589~1712년 판각된 『가흥대장  九.” [北宋]司馬光 編撰, 『자치통감신주(資治通鑑新注)』第4冊, 西安:陝西人民出版社, 1998,
 경』에 처음 단독으로 입장(入藏)됐다.   p.3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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