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8 - 고경 - 2018년 6월호 Vol. 62
P. 38
모든 사람들이 스승으로 존경했다는 승조에게 반야중관사상을 정확 물론 도안이 건의하기 전에 부견은 이미 구마라집을 만날 생각이 있었
히 가르쳐 준 구마라집은 401년 음력 12월 후진의 수도 장안(현재의 서안) 다. 『고승전』 「구마라집전」에 보이는 “전진 건원 13년 (377) 정축년 정월에
에 도착, 국가적인 후원과 오늘날 과학자들의 협동 연구 작업을 방불케 하 태사가 아뢰었다. ‘정축년 정월의 별자리와 상응하는 외국의 어느 곳에 별
는 고도로 조직화 된 팀을 두 축으로 삼아, 체계적인 경전 번역에 착수했 이 나타났습니다. 필시 덕이 높은 지혜로운 분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보좌
3)
다. 장안에 도착하기 전 머물렀던 감숙성 고장(姑藏) 엔 불법을 전파할 여 하게 될 것입니다.’ 부견왕이 말했다. ‘짐이 들으니 서역에 구마라집이, 양
건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었다. 『고승전』 「구마라집전」에 보이는 “구마라 양에 도안이라는 사문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이들이 아니겠는가?’ 즉시
7)
집이 양주에 체류한 지 여러 해, 여광(呂光)과 아들 여찬(呂纂)이 불법(佛法) 사신을 파견해 그들을 찾게 했다.” 는 구절이 이를 증명한다. 전진(前秦)의
을 홍포하지 않았다. 불교에 대한 심오한 이해를 갖고도 가르침을 펴고 교 10만 대군이 양양을 공략하고 68세의 도안을 장안으로 데려간 것이 379
4)
화할 수 없었다.” 는 기록에서 정황을 알 수 있다.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는 년, 부견은 377년에 이미 구마라집과 도안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도안의
탁월한 학승인 그가 고장에 머무른 데는 사정이 있었다. 건의가 없었더라도 언젠가는 구마라집을 장안으로 초치 (招致)할 생각이었
5)
서기 382년 전진 (前秦)의 부견( 符堅, 338~357~385) 왕은 장군 여광(呂光) 던 것이다.
을 서역에 파견했다. 이미 사해(四海)에 이름이 쟁쟁한 명승(名僧) 구마라집 그러나 안타깝게도, 383년 음력 8월 안휘성 비수(淝水) 부근에서 벌어
을 구자(龜玆)국에서 장안으로 모셔오기 위해서였다. 서역 여러 나라의 조 진 동진과의 전투에서 부견의 90만 대군이 대패하고 말았다. 불행은 여기
공을 받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구마라집을 데려오자는 계획은 도안(道安, 서 끝나지 않았다. 비수대전이 끝난 후 2년만인 385년 음력 8월 부하였던
312~385)의 건의에 따른 조치였다. 『고승전』 「도안전」에 “도안은 구마라집 선비족(鮮卑族) 모용수(慕容垂)와 강족(羌族) 요장(姚苌)이 부견을 살해하고
이 서역에 있다는 소식을 먼저 들었다. 경론을 함께 강의하고 그 뜻을 토 그의 나라마저 위협했다. 결국 저족(氐族) 부홍(苻洪, 285~350~350)이 350
론하고 싶었다. 매번 부견 왕에게 구마라집을 모셔올 것을 권했다.” 는 기 년 장안에 건립한 전진은 394년 역사에서 사라진 반면, 모용수는 지금의
6)
록에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북성 정현 (定縣)에서 후연(後燕, 384~407)을, 요장은 장안에서 후진(後秦,
384~417)을 각각 세웠다.
3)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무위현(武威縣). 서역을 떠나 장안으로 향하던 여광(338~386~399)은 감숙성 양주(凉州)
4) “什停凉積年, 呂光父子旣不弘道, 故蘊其宗海, 無所宣化.” [南朝梁]慧皎 著·湯用彤 校注,
『고승전 (高僧傳)』, 北京:中華書局, 1992, p.51. 에서 이 소식을 들었다. 그곳에서 자립해 후량(後凉, 386~403)을 세우고 장
5) 338년은 태어난 해, 357년은 왕위에 오른 해, 385년은 죽은 해를 각각 나타낸다. 이후 왕과
황제의 경우 이렇게 연도를 표시한다. 한편, 부견과 그 시대에 대해서는 다음 연구를 참조할
것. 박한제 지음, 『중국 중세 호한(胡漢)체제 연구』, 일조각, 1988; 박한제 지음, 『박한제 교수
의 중국 역사기행 1 - 영웅시대의 빛과 그늘』, 사계절, 2003. 7) “至符堅建元十三年歲次丁丑正月, 太史奏云: ‘有星見於外國分野, 當有大德智人入輔中國.’
6) “安先聞羅什在西國, 思共講析, 每勸堅取之.” [南朝梁]慧皎 著·湯用彤 校注, 『고승전 (高僧 堅曰: ‘朕聞西域有鳩摩羅什, 襄陽有沙門釋道安, 將非此耶.’ 即遣使求之.” [南朝梁]慧皎 著·
傳)』, 北京:中華書局, 1992, p.184. 湯用彤 校注, 『고승전 (高僧傳)』, 北京:中華書局, 1992, p.49.
36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