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7 - 고경 - 2018년 6월호 Vol.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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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을 정도였다. 구마라집의 역경사업은 나아가 불교의 핵심적인 몇 가
지 교의 (敎義)들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제공해 중국불교의 전성기인 수당
불학 형성에 지적 토대를 마련해 준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때인 405년 구마라집이 『대품반야경 (마하반야바라밀경)』과 『대지
도론』 번역을 마무리했다. 역경에 참여했던 승조는 ‘마음으로 체득한 반
야사상에 대한 견해’와 ‘스승으로부터 배운 학식 (學識)’을 바탕으로 유명한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을 지어 구마라집에게 읽어보기를 요청했다. 글
을 본 구마라집이 승조에게 “불교경전에 대한 이해와 해설은 내가 그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지만,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내가 자네보
다 못하다.” 며 높이 칭찬했다. 또한 “공사상을 제일 잘 이해한 사람은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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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승조 그다.” (혜달의 조론 서문) 라고 구마라집이 말한 데서도, 반야중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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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에 대한 승조의 이해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승조의 동학 축도생이 407년 「반야무지론」을 여산의 혜원 (慧遠, 334~416)
과 은사(隱士) 유유민(劉遺民, ?~410) 등에게 전달했다. 이를 읽은 유유민 ―
19)
구마라집의 고향인 중국 신강성 쿠처현에 있는 구마라집 동상.
20)
은 “스님 가운데 뜻밖에도 평숙(平叔)이 있을 줄이야!” 라며 감탄했고, 혜
뒤로 보이는 석굴은 키질석굴이다.
17) “吾解不謝子, 辭當相揖” [南朝梁]慧皎 著·湯用彤 校注, 『고승전(高僧傳)』, 北京:中華書局,
1992, p.249. 원은 찻잔을 올려놓은 탁자를 어루만지며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라며
21)
18) “解空第一, 肇公其人.” 河北省佛敎協會, 『大藏新纂卐續藏經(影印本)』 第54冊, 2006, p.31a.
이하 이 속장경에서 인용할 때는 XX로 표시한다. 예를 들면 XX.54, p.31a. 페이지 숫자 뒤의 찬탄을 연발했다.
a, b, c는 해당 페이지의 상단, 중단, 하단을 의미한다. 한편, 2006년 전90권(색인 1권, 목록 1권
포함)으로 영인된 이 속장경의 내용은 타이완에서 출간된 그것과 차이가 없으나, 체제와 구 스승이 칭찬했던 「반야무지론」에 이어, 410년엔 「부진공론(不眞空論)」과
성이 다르다.
19) “去年夏末, 始見生上人示無知論.” J.20, p.265a. 「물불천론(物不遷論)」을 잇따라 발표했다. 413년 스승 구마라집이 타계한
20) “不意方袍, 復有平叔.” [南朝梁]慧皎 著·湯用彤 校注, 『고승전(高僧傳)』, 北京:中華書局, 그해 승조는 마지막 작품으로 보이는 「열반무명론(涅槃無名論)」을 지었다.
1992, p.249. 평숙은 하안(何晏)의 자. 후한말의 대장군 하진의 손자로 190년 태어난 하안
은 후일 조조의 사위가 된다. 노장사상을 유학에 접목시켜 “천하 만물은 무를 근본으로 한
다.(天下萬物, 以無爲本)”고 주장하며 왕필과 함께 위진현학을 창도하는 데 앞장섰다. 249년 쿠
데타를 일으킨 사마의 중달(179~251)에게 피살됐다. 21) “未常有也.” [南朝梁]慧皎 著·湯用彤 校注, 『고승전(高僧傳)』, 北京:中華書局, 1992,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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