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9 - 고경 - 2018년 7월호 Vol.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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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불러야 한다.


              간다라 미술과 반가사유상




              국보 제78호 금동반가사유상과 국보 제83호 금동반가사유상[사진 5 위 왼
            쪽]의 도상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반가사유상은 태자사유상일까, 미
            륵보살상일까. 반가사유상의 도상 해석에 관한 논쟁은 불교미술사에서 중

            요한 이슈이다.

              반가사유상이 처음 등장한 것은 간다라 미술이며 쿠샨인들은 고민하는
            다양한 인물들을 반가사유 자세로 표현하였다. 대표적인 예는 첫 선정에
 사진 4.
 열반, 2~3세기,   든 싯타르타 태자와 석가여래에게 패배한 원인을 찾는 마왕이 모습이다.
 미국 프리어새클러박물관.
            싯타르타 태자는 아버지를 따라 농경제에 참석했다가 약육강식의 세계를

            목격하였다. 즉 농사철이 되어 농부가 쟁기질을 하자 땅 속에서 나온 벌레
            를 작은 새가 잡아먹었고, 벌레를 먹은 새를 매가 잡아먹는 광경을 보고 잠
            부 나무 아래에 앉아 첫 선정에 들었는데, 깊은 선정에 든 싯타르타 태자

            가 바로 반가사유 자세를 취하고 있다(사진 5 아래쪽).

              관세음보살은 간다라에서 가끔 연꽃을 든 반가사유상으로 조성되었
            다[그림 5 위 오른쪽]. 간다라의 관세음보살상은 지물持物로 연꽃을 들며, 미
            륵보살상은 수행자를 상징하는 수병水甁을 손에 든다. 보관에 스승인 아미

            타불을 작게 표현한 화불化佛이 있고, 손에 정병淨甁을 든 관세음보살상은

            7세기 이후에 등장한다.
              간다라의 반가사유상 도상은 중국으로 전파되면서 초기에는 태자사유
            상으로 조성되다가 차츰 미륵보살상으로 정착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

            국시대에 반가사유상이 유행했으며,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은 스스로를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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