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2 - 고경 - 2018년 10월호 Vol.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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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적 이행도 절차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분별지 이후에나 후
득분별지를 얻게 되듯이, 원성실성을 얻은 이후에나 의타기성을 얻게 된
다. 변계소집성에서 곧바로 의타기성으로 이행해갈 수는 없는 것이다.
변계소집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자아와 대상이다. 이것들은 연기된 것
이므로 의타기성을 지닌 것이지만, 정감에 의해 의타기성을 상실하고 변
계소집성만을 지니게 된다. 하지만 변계소집된 자아와 대상이 모두 ‘생주
이멸의 상태에 있으므로 공’(원성실성)이라는 것을 체득하게 되면, 자아와
대상은 공에 토대를 둔 분별된 성품(의타기성)을 지닐 수 있게 된다. 원성실
성에는 변계소집성의 특징인 아집이나 법집이 더 이상 없고 제법의 진실
2)
성만이 있다. 의타기성에는 분별된 성품이 있되 변계소집된 성품은 없다.
아집과 법집을 버리는 것이 수행이 지향하는 것인데, 앞서 언급한 서양
철학자는 그의 문화권에 맞게, 그것이 양심의 소리를 듣고 죽음을 선취하
는 일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세속에서 벗어나라는 양심의 소리를 듣는 것
이 법집을 버림의 방안이고, 죽음을 선취하여 자아의 지속에 대한 욕망을
버리는 것이 아집을 버림의 방안이라는 것이다. 그가 비록 서양철학의 거
장일지라도, 아공과 법공에 대해 사유하고 있는 이상, 그를 서양의 수도승
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 『成唯識論』, T1585_.31.0046b10: 二空[我空과 法空]所顯圓滿成就諸法實性名圓成實.
정은해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 철학박사, 성균관대 철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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