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5 - 고경 - 2020년 12월호 Vol.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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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이 조선불화에 있어 화엄사상과 관련한 세 점의 탱화와 함께
19세기 초에 조성된 통도사 화엄탱화 그리고 19세기 후반에 조성되어 현존
하는 몇 점의 ‘화장찰해도’ <사진 5>가 우리나라 화엄사상과 관련된 불화연
구의 폭을 확대되도록 해주고 있다. 비록 관련 도상이 많은 숫자는 아니지
만 귀중한 문화적 사상적 자산임이 분명하다.
이와 관련하여 돈황 막고굴에 남아 전하는 화엄7처9회도와 우리나라
의 화엄 7처9회탱의 차이점과 함께 관련성을 확인할 수도 있다는 점은 동
북아시아 불화의 중요한 유산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긴 시간적 차이가 있
었음에도 불구하고 화면의 도상 배치 형식이 돈황 막고굴에 전해오는 당·
오대에 조성된 6점의 ‘화엄경변상도’와 조선시대의 화엄 7처9회탱은 도상배
치 형식이 지상과 천상으로 연계되는 『화엄경』 설법내용에 따라 3단3열로
설법회 배치가 동일하면서 또한 9회의 각각 배열된 자리는 굴窟에 따라 차
이를 보이는 점 등이 그러하다. 하지만 모두 『80화엄경』의 변상도이고 조선
후기에 조성된 송광사, 선암사, 쌍계사 등의 ‘화엄 7처9회탱’에 보이는 선재
구법의 이야기도 다르게 묘사되어 있으나 그려지던 당시, 선재구법도가 차
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았음은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화엄 7처9회탱이 조선 후기에 불화형식으로 출현하는 데에 있어
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이 시기 화엄사상의 성행이었다. 이렇게 우리나라
의 ‘화엄 7처9회탱’은 동북아시아와의 관련과 신라 이래의 도상을 바탕으
로 하고 있으나 결정적인 요인은 조선 후기에 성행했던 화엄사상을 배경으
로 새롭게 창출된 독자성으로 해석할 수 있겠으며 이는 교학과 문화가 시
대에 따라 끊임없이 모색하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부처님
의 가르침을 전하고자 하는 간절한 원력이 그 바탕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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