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5 - 고경 - 2021년 9월호 Vol.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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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遊山에서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
던 쌍계사를 최치원을 중심으로
재편하고 이곳에 들르는 모든 사
람들에게 최치원을 직접 보고 느
끼게 하는 것이 사찰을 보존하는
방편의 하나라고 판단했던 것은
아닐까?
이처럼 쌍계사는 최치원을 선양
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사찰인
데다 서산西山까지 더해졌지만, 단
속사는 이와 비교해 여러모로 부
족한 조건에다 서산과의 인연도 모
자라 운명이 갈린 것으로 생각된
다. 한 명의 인재가 사회의 운명을 사진 6. 진감 선사 탑비.
바꾼 사례는 이 외에도 많다.
사족蛇足 하나. 단속사의 ‘광제암문’이라는 바위 글씨 주변을 살펴보면
‘통화십삼년統和十三年(995)에 혜규惠暌라는 스님이 쓰고 효선曉禪이라는 스
님이 새겼다’는 명문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며, 신행 선사의 비도 영업靈業
스님이 썼다고 전한다. 단속사는 실제 쌍계사와 비교해 최치원과 같은 거
유와의 인연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1616년 성여신이 쌍계사에 들렀지
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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