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3 - 고경 - 2021년 9월호 Vol.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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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단속사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우연히 서산이 쓴 『삼가귀감』을 보게 된
성여신을 비롯한 젊은 선비들은 유가의 글이 가장 뒤에 편집된 것을 보고
승려들이 유가를 능멸했다고 생각했다. 이를 빌미로 책과 경판은 물론 불
상까지 불태웠는데, 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50세에 가까운 서산의 심
정은 어땠을까? 이 사건이 얼마나 결정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때부터 기
울어지기 시작한 단속사의 사세는 끝내 반전되지 못한다.
운명을 가른 진짜 이유
성리학을 전면에 내세우는 사회에서 선유先儒인 최치원을 숭모한다는
것은 마치 불교가 『부모은중경』을 판각하거나, 승군僧軍을 조직하여 전쟁
에 나아가는 것만큼이나 복잡 미묘한 일일 것이다. 다만 불교 입장에서 보
면, 거유巨儒이며 불자佛子였던 최치원을 존숭하는 것은 외적 명분과 내적
위안을 동시에 얻을 수 있고, 성리학 일변도 사회에서 불교의 생존 가능성
까지 담보할 수 있는 방안方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최치원의 유묵과 진영을 모두 갖춘 두 사찰의 운명이 갈린 이유는 무엇
일까? 성여신과 그 일행이 공부를 위해 단속사로 가지 않고 만약 쌍계사
로 갔으면 결과가 바뀌었을까? 『삼가귀감』의 편집 순서가 달랐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아무도 모를 일이다.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쌍계사 중창
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서산이 진감비를 중심으로 쌍계사를 재편한 것은
최치원을 쌍계사의 전면에 내세운 것이라 볼 수 있다.
선비들이 거유巨儒의 글씨를 대하는 것이 마치 그를 직접 대하는 것과
비슷한 경향이 있다는 것을 젊은 시절 유학을 공부했던 서산은 잘 알고 있
었을 것이다. 그래서 호연지기를 기르기 위해 지리산을 찾는 유자들의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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