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1 - 고경 - 2022년 10월호 Vol.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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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토쿠태자나 가마쿠라 불교를 일본불교의 키
             워드로 언급한 이들은 비단 하나야마나 이에나가
             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야마의 스승이었던 다

             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郎와  무라카미  센쇼村上専

             精가  「불교국민」과  「일본불교의  특징」에서  이미
             언급했다. 무라카미 센쇼는 일본불교의 구조를 정
                                                           사진 5 이에나가 사부로.
             리했고, 다카쿠스 준지로는 센쇼의 일본불교론을

             이어받아 다른 나라와 대비되는 일본불교의 우위성을 전개했다. 하나야마

             는 이들의 일본불교론을 받아들여서 좀 더 심화시켰다고 보는 것이 타당
             하다.
               패전 이후, 하나야마는 쇼토쿠태자와 연결된 일본불교론 연구에서 한발

             물러났다. 하나야마뿐 아니라 학계에서도 일본불교와 황실, 국가를 분리

             하려는 경향들이 지속되었다. 결국, 황실과 국가가 떨어져 나간 일본불교
             에는 가마쿠라 불교만이 남게 되었다. 하나야마와 이에나가는 살아남은 가
             마쿠라 불교가 최상의 일본불교라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더해서 가

             마쿠라 불교를 ‘민중성’으로 정의했다.

               도겐道元과 신란을 일본불교의 최정점에 올려놓은 ‘가마쿠라 신불교 중
             심사관’은 하나야마와 이에나가에 의해서 성립되었다. 여기에는 각 교단이
             대학을 설립해 가마쿠라 불교에서 일본불교의 원류를 찾고자 하는 학술적

             노력이 기반이 되었다. 학계에서는 가마쿠라 불교와 서구의 종교개혁을 비

             교해 민중성을 도출해 냈다. 나아가 도겐과 신란의 사상은 서구의 사상과
             견줄 수 있는 일본사상으로 그 우위성을 제시했다. 가마쿠라 불교의 갑작
             스런 대두는 패전으로 황폐화한 일본 사회가 다시 일어서고자 한, 혹은 당

             시 사회적 분위기의 표출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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