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2 - 고경 - 2022년 10월호 Vol.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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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이들의 가마쿠라 불교 재조명 이
후, 불교계 출판물의 키워드가 ‘가마쿠라 불
교’와 ‘민중’이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1940년대 대표적 저서로는 핫토리 시소服部
之総의 『신란 노트』 (1948)나 이에나가의 『중
세불교 사상사 연구』 (1947)를 꼽을 수 있다.
저서들은 신란親鸞을 쇼토쿠태자와의 연결
성을 강조한 국가와 황실의 신란이 아닌, 민
사진 6. 『중세불교 사상사 연구』(1947).
중을 해방시킬 수 있는 불법을 제시하는 새
로운 신란상을 창출해 냈다. 특히 이에나가가 제시한 ‘고대=구불교=국가
적/ 중세=신불교=민중적’이란 도식은 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현재까
지도 불교·역사·문화 분야에서 통용되고 있다.
하나야마 신쇼는 일본불교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논할 때, 시점이 바뀌
는 중요한 위치에 서 있다.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쇼토쿠태자를 연결하는
국체론의 시각에서 일본불교의 본질을 바라봤지만 패전 후에는 국체론을
버리고 국가가 아닌 민중을 택했다. 패전 이후 하나야마처럼 국체론과 결
부된 불교연구를 진행한 연구자들은 대부분 침몰했다. 하나야마가 가마쿠
라 신불교를 대두시켰다고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 역시 학문적 침몰
자 중 하나였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이러한 판단에는 패전 후 그의 연구가
진전이 없었다는 이유가 크다. 반면 하나야마의 ‘일본불교’는 부정된 것이
아닌 단순히 포기된 것이며, 이에나가 사부로에 의해 보강되었다는 시각
역시 존재한다. 아울러 패전 후 간행한 그의 저서들이 ‘반권력적 자유주의’
란 평가를 얻으며 독자를 확보했다는 아이러니한 상황 또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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