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 - 선림고경총서 - 25 - 종문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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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금나라와의 전란 속에서 화해가 성립됨에 따라 주전론자인 장

            구성(張九成)의 무리로 취급되어 형주(衡州)땅으로 유배되었다.소흥 21
            년에는 다시 매주(梅州)로 옮겨갔는데,이 유배생활 10여 년 동안에 지은
            것이 바로  정법안장(正法眼藏)  6권인 것이다.
               그 뒤 소흥 26년에 사면되어 육왕산(育王山)에 머무르면서 굉지 정각
            (宏智正覺)스님과 교우를 맺었다고 한다.소흥 28년에는 다시 경산으로
            돌아와 효종(孝宗)임금의 귀의를 받아 대혜선사라는 호를 받게 되었다.
            융흥(隆興)원년(1163)에 시적하시니 세수는 75이시며 법랍은 58이었다.

               저서에는  대혜어록(大慧語錄), 대혜무고(大慧武庫)  등이 전하는

            데,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대혜보각선사서(大慧普覺禪師書) 가 있다.


            이 중  종문무고(宗門武庫)는  대혜선사종문무고(大慧禪師宗門武庫)

            또는  대혜무고(大慧武庫)라고 불리기도 한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종문무고 는 대혜스님의 제자인 도겸(道謙)스님
            이 수집하여 편찬한 것으로,순희(淳熙)13년(1186)에 간행된 것이다.이
            어록집이 생기게 된 내력에 관해서는 효영(曉瑩)스님의  운와기담(雲臥
            紀談) 의 ‘둔암 무언(遯菴無言)스님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이렇게 기록되
            어 있다.즉 소흥 10년(1140)봄 신무언(信無言)이 대혜스님이 경산사에
            거주하시면서 하셨던 말씀을 모아 적어 두었는데,복청(福淸)의 진형(陳
            兄)이  진서(晉書)  두예전(杜預傳)에 나오는 ‘무고(武庫)’라는 말을 가지
            고 장난 삼아 붙인 것이 그만 이름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그러나 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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