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 - 선림고경총서 - 32 - 종용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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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송노인을 뵈었을 때 그는 인적을 끊고 집안 일을 물리치고 혹
            한이나 무더위에도 참선을 거르는 날이 없었고 아침해가 뜰 때까지 기름

            등을 태워 공부하며 침식을 잊고 지낸 지 거의 3년이었다.나는 외람되
            게도 스님의 법은(法恩)을 입고 자식으로 인가받아 담연거사 종원(湛然
            居士從源)이라는 이름을 얻었다.스님과 참학을 할 때면 그 기봉을 헤아
            리기 어려웠고 변화가 무궁하였다.만 길 봉우리같이 우뚝하여 어떻게
            우러러볼 길이 없고 만경창파같이 도도하여 도저히 끝을 재볼 수 없었
            다.우러러보면 앞에 있는 듯하다가 홀연히 뒤에 가 있곤 하여,평소에
            배웠던 것을 되돌아보니 모두가 흙덩어리였다.아!동산(東山)에 올라 노
            (魯)나라를 좁다 하시고 태산(泰山)에 올라 천하를 좁다 했던 것이 어찌
            빈말이었겠는가?이 깊은 곳에 아직 들어오지 못한 자는 이 말을 들으면
            필시 내가 근본을 잊고 이단이나 좋아한다고 생각할 것이다.오직 한가
            한 병풍산만이 서로가 서로를 비추지 않겠는가?

               그 뒤 명을 받들어 행재소(行在所)에 나가 호종관(扈從官)으로서 서쪽
            으로 정벌을 나가게 되었으므로 스님과 몇천 리나 떨어져 있는지도 모른
            다.스님이 평소에 하신 법어와 게송은 전부 사형 융공(隆公)이 간수해
            왔는데 지금은 그 원본을 다시 얻어 볼 수 없다.
               우리 종문에 천동(天童)이란 분이 있어 송고(頌古)백 편을 지었는데
            그것을 절창(絶唱)이라고들 한다.나는 만송노인(萬松老人)께 ‘이 송에
            평창(評唱)을 붙여 후학들을 틔워 일깨워 주십사’하고 간청하는 편지를
            7년을 두고 전후로 아홉 차례나 보냈는데 이제서야 답장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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