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 - 선림고경총서 - 32 - 종용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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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송노인 평창 천동각화상송고 종용암록 서
지난날 내가 서울[京師]에 있을 때,그곳에는 많은 선사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 특히 성안사(聖安寺)징공(澄公)화상은 정신과 기개가 명백하고
단엄하며 말씀이 분명하고 공명정대하였으므로 내 유독히 그를 중히 여
겼다.그래서 한번은 조사의 도를 가지고 찾아가 이것저것 옛 큰스님들
의 어록 중 배울 만한 점들을 가지고 묻곤 하였는데,간혹 징공(澄公)이
옳다고 인정하는 부분이 있으면 나 역시 마음속에 스스로 얻는 바가 있
었다.
그러다가 근심거리를 만나 뒤로부터는,공명심은 높은 누각에다 묶어
두고 조사의 도를 구하는 일에만 더욱 서둘렀다.전에 논의하던 문제를
가지고 성안사를 두 번째 찾아가니 스님께선 전에 보였던 것과는 달리
태도가 바뀌어 있었다.내가 이상하게 생각하자 스님은 조용히 내게 말
해 주었다.
“지난날 그대는 요직에 몸담고 있었다.그리고 유학(儒學)하는 사람은
대부분 불서를 깊이 믿지 않고 어록을 뒤적이면서 말밑천이나 삼으려 하
기 때문에 내 감히 수고스럽게 선가의 매서운 수단을 써 주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 그대의 마음을 헤아려 보니,과연 본분사(本分事)를 가지고
내게 물어 오는데 내 어찌 전의 허물을 답습하여 입 아프게 이야기해 주
지 않으랴.그러나 나는 늙었고,평소 유학에는 통달치 못하였으니 그대
를 가르칠 수가 없다.만송노인(萬松老人)이란 분이 있는데 그는 유가와
불도를 겸비하고 종지와 설법에 모두 정통하시며 걸림 없는 말솜씨를 가
지셨다.그대는 그 분을 뵙는 것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