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3 - 고경 - 2015년 2월호 Vol.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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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목표로 삼는다. 하지만 성철 스님은 성문승으로 분류되  이며, 그것이 불교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보살승에서

 는 무리들은 생멸의 견해를 벗어나지 못한 수행자들이라고   는 중생을 위해 헌신하는 보살행을 고해를 건너가는 큰 배
 했다. 사성제를 탐구하여 공부에 진전이 있긴 있지만 그 경  로 삼는다.
 지는 완전한 열반이 아니라 유여열반일 뿐이라는 것이다.  성철 스님은 보살승에 대해 “남을 위해서라면 내가 해탈
 둘째는 연각승(緣覺乘)이다. 글자의 의미로 보면 ‘연기의   하는 것은 그만두고 지옥을 하루에 천만 번 가도 좋다는 대
 깨침이라는 배’라는 뜻이다. 부처님을 뵙지는 못했지만 부처  보리심을 발해서 육도만행을 닦는 사람”이라고 했다. 끝없이

 님께서 설한 연기의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고해를 건너 피안  남을 돕는 육바라밀의 실천으로 마침내 피안에 도달하는
 으로 가는 사람이다. 연기법을 자각함으로써 무명을 밝히고   것을 배로 삼는 것이 보살승이다.
 고통에서 벗어났음으로 연기를 깨닫는 것이 고해를 건너가

 는 배가 되는 셈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피안으로 건너   일불승과 다승불교
 간 성문과 달리 연각승은 혼자서 연기의 진리를 깨닫는 수  대승의 관점에서 보면 성문과 연각은 자신의 해탈만을 추
 행자들이므로 달리 독각승(獨覺乘)이라고도 한다.  구하므로 잘못된 것이다. 반면 중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
 성철 스님은 연각승이 비록 십이연기를 관찰하여 깨달음  는 보살승이 바른 불교가 된다. 그러나 성철 스님은 “부처님
 을 얻은 사람들이지만 중도의 이치를 바르게 깨친 경지는   의 근본 입장은 성문승도 아니고 연각승도 아니며 보살승도

 아니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생멸의 관점에서 십  아닌, 오직 일승(一乘)”이라고 했다. 그 근거로 “시방국토 중
 이연기를 관하기 때문에 여전히 치우친 변견 (邊見)에 머물러   에 오직 일승법만 있을 뿐 이승과 삼승은 없다”는 『법화경』
 있다. 따라서 연각은 중도를 바로 깨치지 못했음으로 이들   의 말씀을 들고 있다. 오직 일승인데 상황에 따라 성문과 연

 또한 유여열반의 경지에 이르렀을 뿐이다.  각을 말하고, 때로는 보살을 보태 삼승을 말하지만 그것은
 셋째는 보살승(菩薩乘)이다. 글자 그대로 보면 ‘보살행의   모두 방편이라는 것이다.
 배’라는 뜻이다. 성문과 연각은 진리를 깨닫는 것에 비중  그렇다면 일승이란 무엇인가? 스님은 일승이란 “진여법계
 을 두고 자신의 해탈에 몰입한다. 그래서 대승에서는 이들  를 바로 깨친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그 진여법계를 바로 깨
 을 ‘작은 배’라는 뜻에서 소승이라고 폄칭했다. 하지만 보살  친 사람은 성문과 연각처럼 생멸의 관점에서 연기와 사성제

 은 중생을 향한 끝없는 실천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다. 모  를 이해하거나, 자신의 해탈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
 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무한한 실천이야말로 자비의 실현  다. 그렇다고 일체 중생의 해탈을 위해서 끝없이 보살행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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