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4 - 고경 - 2015년 2월호 Vol.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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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사람들도 아니다. 일승이란 “오직 중도를 정등각하여 를 수 있다는 것이다. 삼승이 방편이라는 것은 아득한 세월
진여법계를 바로 보는 사람”이다. 동안 말씀만 듣거나, 교리만을 연구하거나, 봉사만 하는 것
따라서 성문, 연각, 보살이라는 각각의 탈 것은 진정한 배 이 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처님의 배를 타고 금생에 깨치
가 아니다. 고해를 건너갈 수 있는 유일한 배는 일승뿐이기 고 여래의 집에 도달하는 것이 일불승의 핵심이다.
때문이다. 일승은 달리 일불승(一佛乘)이라고도 한다. ‘부처 둘째, 대승과 소승이라는 담론은 배가 크냐 작으냐를 따
님이 타는 유일한 배’라는 뜻이다. 말씀만을 듣는 것도 아니 지는 것이다. 하지만 일불승은 배의 크기가 아니라 피안으
고, 연기의 진리를 생멸적으로 깨닫는 것도 아니고, 보살행 로 가는 배이냐 아니냐의 문제로 전환된다. 자기 수행과 해
만 실천하는 것도 답이 아니다. 부산으로 가는 사람은 반드 탈만을 추구하는 성문과 연각은 소승으로 폄하되고, 끝없이
시 경부선을 타야하듯이 불자들은 부처님의 세계로 가는 보살행을 실천하는 보살은 대승으로 구분된다. 하지만 성철
배를 타야 한다. 그래야 완전한 해탈을 얻고 ‘부처님의 집 〔如 스님은 부파불교의 전통이 자신의 이익에만 치중했기 때문
來家〕’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에 그런 편견을 부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보살승이라고 보
성철 스님은 부처님이 타는 그 배는 ‘중도를 바로 깨치는 았다. 중도의 관점에서 보면 보살승 역시 방편일 뿐이다. 이
것’이라고 했다. 부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들은 성문이든, 가 런 맥락에서 보면 소승이냐 대승이냐는 무의미하다. 관건은
르침을 궁구하여 연기를 깨친 연각이든, 무한한 자비심으로 배의 크기가 아니라 그 배가 피안으로 가는 배이냐, 고해의
실천하는 보살이든 핵심은 중도를 깨닫는 것이다. 그래야만 격랑을 떠도는 배이냐이다.
고해를 건너갈 수 있으며, 그것만이 진정한 해탈로 가는 배 셋째, 일불승의 배는 어떻게 탈 수 있는가이다. 성철 스님
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일불승은 다음과 같이 세 가 은 부처님의 배를 타고 여래의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 의미로 읽을 수 있다.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 바른 길이라고 했다. 여래의 배를 타
첫째,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부처님이 타는 배 기 위해서는 참선을 해야 하고, 참선은 화두를 참구하여 깨
를 타야한다는 것이다. 이는 모두가 부처님의 수레를 탈 수 치는 것이다. 참선 수행을 통해 화두를 바로 깨치는 것이 완
있다는 뜻이며, 모든 중생이 본래부처임을 자각하라는 것이 전한 해탈인 무여열반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이다.
다. 성철 스님은 부처님 제자들은 삼아승지겁을 돌아서 깨 그런데 오늘날 한국불교는 소승이나 대승도 아니고 삼승
달은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바로 깨쳤음을 강조 도 아니다. 혹자는 초기불교가 대안이라고 하고, 혹자는 대
한다. 누구나 바른 진리를 깨달아 금생에 궁극의 경지에 이 승불교가 대안이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 한국에는 남방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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