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1 - 고경 - 2015년 2월호 Vol.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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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느긋하게 걸어가겠다는 자세가 중요하다. 가지 않은 길  찬에 초연해야만 절은 절일 수 있다. 동시에 절은 세속의 바

 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던 길이다. 후회할 것도 자책할 것  깥에 있다. 바깥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세속에 물들지 않
 도 없다. 또한 책을 읽으면서 걷는 것은 위험하다. 지도를 보  을 수 있고, 물들지 않은 힘으로 세속을 당당히 가르칠 수
 는 데에만 골몰하다간, 자칫 돌부리에 걸려 나뒹굴 수 있다.   있다. 무엇 하나 모범적이지 않고 모양만 절이라면, 그냥 집
 발밑과 눈앞이, 가장 확실한 미래다.  이다.
            절은 성스러운 공간이다. 크고 번쩍이는 부처님이 있어서

 【제4칙】    성스러워지는 것이 아니다. 절의 성스러움은 비어 있음에서
 부처님이 땅을 가리키다(世尊指地, 세존지지)  움튼다. 적게 먹고 적게 자면서, 많이 먹고 많이 자는 자들
          의 귀감이 된다. 아무 것에도 집착하거나 의지하지 않는 대

 세존께서 대중과 더불어 길을 가시다가 돌연 손가락으로   자유가 절을 절답게 만든다. 누구나 못 잡아서 안달을 내는
 땅바닥을 가리켰다. “여기에 절을 세우라.” 제석(帝釋)이   잉여가치가, 이 안에서는 생판 남의 일이다. 절에 사는 자들
 한 포기 풀을 뽑아 땅에 꽂으면서 아뢰었다. “절을 다 지  은 인간이기를 포기함으로써, 인간들의 존경을 받는다.
 었습니다.” 세존께서 빙그레 웃으셨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절은 절이 아니다. 사람들이 그리워


 절을 뜻하는 한자인 ‘寺(사)’의 유래는 이러하다. <설문해
 자(說文解字)>는 발바닥이 땅에 닿아 있는 모습을 그린 ‘멈
 출 지 (止)’와 작업하는 손을 뜻하는 ‘도울 우(又)’를 더한 글

 자라고 전한다. 결국 사찰의 원초적 의미는 어느 한 장소에
 정착해 묵묵히 일을 하는 사람들의 공간이다. 자못 정적 (靜
 的)이고 담백한 어원이다. 인도에서 온 수행자들의 소박하고
 정갈한 일상은, 돈 좋아하고 떠들썩한 현지인들에겐 그야말
 로 진풍경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절은 조용하다. 조용해야 절이다. 말이 많으면 절
 이 아니고 흥정이 오가면 절이 아니다. 비난에 덤덤하고 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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