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2 - 고경 - 2015년 3월호 Vol.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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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듣다가 대중이 흩어지면 홀연히 사라지곤 했다. 어느 뚱이는 잔잔하여 반드시 누군가 와서 돌을 던지며, 하늘의
날은 법문이 끝났음에도 떠나지 않자 백장이 물었다. “그 몸뚱이는 파래서 기필코 먹구름이 끼게 되어 있다.
대는 누구인가?” 노인은 사연을 설명했다. “저는 본래 가 ‘불매 (不昧)’란 ‘어둡지 않다’ 혹은 ‘어리석지 않다’는 뜻으
섭부처님 때에 이 산에 살았었습니다. 한번은 어떤 학인 로, 그만큼 백장이 인과의 이치를 잘 알고 있었음을 시사한
이 ‘뛰어난 수행자도 인과(因果)에 떨어집니까?’라고 묻자 다. 반면 콩을 심었음에도 팥이 나기를 원한다면, 이는 무지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대답했다가 그 과보로 여우의 이거나 기만이다. 노인은 진실을 속인 죄로 평생을 전전긍긍
몸을 받아 500생을 살았습니다. 이제 큰스님께 청하노니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업보를 받았다. 여우는 잔꾀가 많은
한 말씀을 내려주소서.” 이에 백장은 다음과 같이 전했다. 만큼 의심이 많은 동물이다. 야호선 (野狐禪)은 겉으로는 자
“나는 인과에 어둡지 않다[不昧].” 노인은 이 말끝에 크게 비를 운운하지만 본색은 양아치와 다를 바 없는 수행자를
깨달았다. 꼬집는 말이다. 갖은 거짓말과 해코지로 사회를 불바다로 만
드는 불여우들은 지구촌 곳곳에서 눈에 밟힌다.
가섭 (迦葉)은 부처님의 법을 이어받은 후계자다. 오랜 세 모든 생명은 시간에 허물어지고 타자(他者)에 시달려야 하
월 고생하던 노인은 결국 여우의 몸을 벗고 극락왕생했다는 는 육체성을 극복할 수 없다. 물론 무시할 수는 있는데, 그러
후문이다. 인과에 대한 통찰로 인해 절대적인 안식을 얻은 려면 일정한 용기가 필요하다. 쓰러지면 기어가고, 넘어지면
셈이다. 죽지 못해 살다가 비로소 죽었으니, 참으로 다행한 쉬어가고, 비가 오면 이참에 빗물로 샤워나 하자는 긍정. 마
일이다. 찬가지로 누구나 인과에 매여 있다. 다만 인과를 흔쾌히 감
결과가 있는 건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밥을 먹으면 배가 내할 수 있다면, 삶이 덜 괴롭고 죽음이 덜 무서울 것이다.
부르고 때리면 아프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하고, 벌 아, ‘되는 대로’ 살 수 있다면!
은 늦게 오더라도 기어이 온다. 살아 있는 것은 응당 죽어야
하며, 죽은 것은 또 다른 몸으로 태어나 뒹굴고 더러워지게
마련이다. 이렇듯 인과는 세계를 떠받치고 인생을 지배하는
법칙이다. 왕후장상은 물론 선지식이라도 인과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살아 있는 것들은 전부 몸을 지니며, 그 몸 장웅연(張熊硯) 집필노동자.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2002년부터 불교계에
서 일하고 있다. ‘장영섭’이란 본명으로 『길 위의 절』, 『눈부시지만, 가짜』, 『공부하지 마라』,
은 시련과 불운을 당하기 위해 존재한다. 예컨대 샘물의 몸 『떠나면 그만인데』, 『그냥, 살라』 등의 책을 냈다. 최근작은 『불행하라 오로지 달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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