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0 - 고경 - 2015년 5월호 Vol.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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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 스님의 화두 참선 이야기
그런데, 1919년 3・1항일만세운동이 일어나 조선인들의
자주 의식의 높아집니다. 조선불교인들도 마찬가지였지요.
근현대 간화선의 중흥 특히 청년불자들은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직하여 총독부의
사찰령 폐지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수 승려들은
일제의 정책에 순응합니다. 더구나 일본불교의 폐풍인 대처
승(帶妻僧) 풍조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파계행(破戒
_ 정리 박희승 行)에 대하여 용성 스님은 총독에게 시정을 요구합니다. 하
지만 일제는 의도적으로 조선 승려의 파계를 조장하였습니
다. 그리하여 다수의 승려들이 결혼하여 가족을 부양하는
세속화가 조선불교 승단에 급속히 확산됩니다. 이것은 광복
후 커다란 문제가 됩니다.
일제강점기 선학원 설립 이때 사찰의 선방에서 오로지 부처님 가르침대로 참선만
개화기에 유교국가 조선왕조의 무능과 일제의 침략 야욕 하던 선승(禪僧)들은 정법과 계율을 지키며 살고자 하였습
은 나라를 망하게 하지요. 1910년 일제는 조선을 강점하고 니다. 그러나 당시 사찰의 주지들은 대부분 대처승들이어서
총독부를 세워 우리나라를 식민통치합니다. 일제 총독부는 사찰 재정을 사유화하고, 선원 수행자를 위한 공양은 점점
불교계를 장악하기 위해 ‘사찰령 (寺刹令)’을 만들어 사찰의 줄였습니다. 이에 선승들은 뭔가 자구책을 모색하지 않을
주지 인사권과 재산 처분권까지 행사합니다. 불교도들은 개 수 없게 됩니다.
화기에 교단을 재건하려 했으나 일제강점으로 다시 무산됩 이리하여 전국 선승들이 서울 안국동에 선학원 (禪學院)이
니다. 란 절을 만듭니다. 일반적으로 절 이름에는 절 사(寺)자를
붙이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선학원이라 한 것은 ‘사찰령’의
통제를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고경」에서는 ‘고우 스님의 화두 참선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고우 스님은 출
일제 말기인 1942년에 전국 선원은 68개, 하안거 정진 대중
가 후 평생 선원에서 정진해 오셨으며, 지금도 참선 대중화를 위해 진력하고
계십니다. 화두 참선의 의미와 방법, 그리고 효과에 이르기까지 고우 스님이 은 500명이었는데, 이 선학원은 전국 선승들의 결집처로 광
직접 경험한 내용을 독자 여러분들께 전해 드리고자 합니다. - 편집자
복 후 승단 정화의 산실이 됩니다.
28 고경 2015.05.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