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5 - 고경 - 2015년 7월호 Vol.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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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는 곳은 깊은 산속 주일을 훨씬 넘겨 석남사로 돌아왔습니다. 절로 들어가는데
나이 육십에 이르러 자유자재함이라. 시래기가 보였습니다. 시래기를 보는 순간 겨울 김장이 다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림을 벗어나 끝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은사스님께 엄청 혼날
금일에 이르러 이제 백졸승이 됨이라. 것이라는 것도 생각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은사스님께서는 저희 일행을 보시자마자
“백 가지가 못났다는 말입니다. 잘난 것은 하나도 없고 못 커다란 대나무 작대기로 저희들을 쫓으셨습니다. 대중생활
날 대로 못났으니 바보처럼 공부만 하라고 주셨어요. 하하.” 을 못했다는 경책이었습니다. 며칠 동안이나 참회를 해서 겨
성철 스님에게 법명을 받은 스님은 울산 석남사로 가 인홍 우 살아 남았습니다.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스님이 성철 스님을 모시고 공부하 또 한번은, 대중들이 다 같이 산에 가서 나무를 하고 나
고 있던 것을 알았던 인홍 스님은 출가를 반겼다고 한다. 면 함께 모여서 차를 마십니다. 그런데 젊은 스님들 입장에
서 보면 그것이 조금 지루합니다. 어른들 사이에서 차를 먹
성철과 인홍, 최고의 스승 고 앉아 있는 것도 편하지는 않고요. 은사스님께서는 차가
잘 알려져 있듯이 인홍 스님 역시 성철 스님을 스승으로 먹기 싫으면 산에 가서 나무를 한 짐 더 해오라고 하십니다.
여기며 공부를 했었다. 당시 불교계에서는 인홍 스님이 ‘비 지금 생각해보면 모두 여법한 대중생활을 위한 훈련 과정
구니계의 성철’로 회자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출가를 결심하 이었는데 저희들이 스님 속도 모르고 너무 철없이 살았습니
고 찾아온 제자가 성철 스님에게 공부를 배웠다고 하니 인 다.”
홍 스님 역시 기대가 컸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 백졸 스님은 석남사 시절에도 화두와의 대결을 게을리하
다. 백졸 스님은 인홍 스님을 “본분에 투철한 참스승”이라고 지 않았다. 그럼에도 공부가 수월하지는 않았다. 성철 스님
강조했다. 을 찾았다. 성철 스님의 당부는 한결같았다. “한 길로 묵묵
“은사스님은 평생 승려의 본분을 지키며 정진하셨고, 또 히 가라.”는 것이었다. 성철 스님을 만나고 오면 공부가 잘
후학들을 위해 헌신하셨던 분입니다. 은사스님께서는 특히 됐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지지부진. 또 성철 스님을
나 젊은 후학들이 한눈을 팔면 가차 없이 혼을 내셨던 기억 찾아 갔다. 몇 번을 그렇게 하니 10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입니다. 석남사에 살 때 전 대중이 팀을 이뤄 탁발을 나갔습 “공부를 해보니 시간이 갈수록 망상은 적어집니다. 그렇
니다. 탁발 기한은 일주일이었는데 제가 속해 있는 팀이 일 다고 공부가 분명한 것은 아니었어요. 그러니 속에서 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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