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5 - 고경 - 2015년 7월호 Vol.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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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 : 그에겐 업식(業識)이 있기 때문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란 잠언은 기능주의적 사고

          의 반영이다. 누구나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품격을 발하
 ‘무(無)’는 우리나라 선원(禪院)의 대표적인 화두다. 이것   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조사선의 세계관은 즉물적이다.
 아니면 ‘이뭣꼬’가 대세다.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던 조주종  인식하되 분별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개는 그냥 개이지
 심 (趙州從諗)의 엉뚱한 답변에서 유래했다. 불성은 부처가 될   ‘개×같은 것’이 아니다. 업식은 일종의 심리적 궤양이며, 절
 성품을 의미하며, 살아있는 것은 전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망에서 발병하고 비관에서 심화된다. 자고로 스스로를 업신

 게 부처님의 근본교설이다. 곧 조주구자는 불교의 핵심을 위  여기는 자는 남으로부터도 대접받을 자격이 없다고 했다. 새
 배하고 있다. 그리고 ‘왜 없다고 했을까’란 의심을 집요하게   가 새여서 날 수 있듯이, 개는 개여서 완전하다.
 물고 늘어지는 것이 간화선의 시작이란 설명이다.   물론 불성이 있든 없든 인생은 녹록지 않다. 깨달음은 세

 하지만 이게 다는 아니다. 위에 소개한 원문에서 나타나  속적 성공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외려 깊이 있는 삶일수록
 듯 조주는 “없다”고만 단정하지는 않았다. 보다시피 “있다”  오해받기 쉽다. 개처럼 벌어도 개처럼 지내야 하는 날들은
 고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단순히 ‘없다’는 것보다 ‘있기도 하  남녀노소에게 부지기수다. 그래서 참다운 삶의 관건은 끝내
 고 없기도 하다’는 주장이 더욱 살갑게 다가온다. 있다가도   전진이 아니라 극복이며, 이를 해결하는 길은 기어이 용기
 없고 없다가도 있으며, 없으면 없는 대로 안타깝고 있으면   로 수렴된다. ‘알면서도 짐짓 범할’ 줄 아는 초연 (超然)의 자

 있는 대로 감질내는 게 삶이니까. 결국 사정이 이러하니 ‘있  세에서, 마침내 삶다운 삶이 열리는 것이다. 사는 게 사는
 다’에도 ‘없다’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의도로 여겨진다는 점  것 같지 않아도 괜찮은, 삶과 죽음이 분간되지 않을 만큼의
 에서, 조주의 말장난은 교육이다.      적멸 (寂滅).

 여기서의 ‘개’란 우리가 욕을 하고 싶을 때마다 걸핏하면
 불러내는 그 개다. 개새끼, 개판, 개고생……. 하찮은 존재나   【제19칙】
 한심한 처지를 가리키는 고금(古今)의 대명사를 일컫는다.   운문의 수미산(雲門須彌, 운문수미)
 아울러 대화를 여는 스님이 말하는 개는 ‘개만도 못한 놈’
 혹은 ‘개나 물어갈 현실’ 따위를 지칭한다. 불성을 인권 혹  “한 생각조차 일으키지 않아도 허물이 있겠습니까?” 운문

 은 행복으로 의역한다면, 요컨대 ‘쥐구멍에도 볕이 뜰 수 있  문언(雲門文偃)이 말했다. “수미산이니라.”
 느냐’는 질문의 변주인 셈이다.


 52  고경  20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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