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6 - 고경 - 2015년 7월호 Vol.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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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미산(須彌山)은 세상의 중심에 있다는 산이자 세상에서                                     은 언제나 나와 너의 틈새에만 있다. 결국 오직 모를 뿐이니,

          가장 높다는 산이다. 그러나 상상 속의 산이어서, 사람은 하                                    오직 할 뿐. 수처작주(隨處作主). 사랑에 상처받지 않을 원천
          루에도 수십 번씩 수미산을 쌓을 수 있다. 은행에서 수미산                                     적인 방법은, 내가 사랑하는 것이다. 입처개진 (入處皆眞). 진
          을 찾아오는 길에 화장이 잘 먹은 수미산을 만나면 수미산                                      실도 내 마음이 봐줘야만 비로소 진실이다. 아무렇게나 있
          이 그리워진다. 수미산이 아닌 데도 수미산이라 우기며 수미                                     어도, 나는 정녕 살아도 되는 짐승이었구나!
          산 한가운데서 돌연 수미산이 당기기도 한다. 눈 뜨면 없음

          을 알기에 차마 눈 뜨지 못하고, 눈먼 정신으로 등성이를 오                                      【제21칙】
          르거나 남의 발을 밟는다. 동네 뒷산의 능선을 바라보면 끊                                       운암이 마당을 쓸다(雲巖掃地, 운암소지)
          임없이 들썩거리는 마음의 흐름 같아서, 이사 가고 싶다.

                                                                                 운암담성(雲巖曇晟)이 마당을 쓰는데 천황도오(天皇道悟)
            【제20칙】                                                               가 다가왔다. “몹시도 구구하군.” 이에 운암이 “구구하지
            지장의 친절(地藏親切, 지장친절)                                                   않은 것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라고 대꾸했다. 다시 도
                                                                                 오가 말했다. “그렇다면 두 번째 달[第二月]이겠군.” 그러자
            지장 : 상좌는 어디로 가려는가?                                                   운암이 빗자루를 세우고 물었다. “이것은 몇 번째 달입니

            법안 : 여기저기로 다니렵니다.                                                    까?” 도오는 더 이상의 대화를 그만두었다.
            지장 : 어떻게 다니려는가?                                                      이를 두고 현사사비(玄沙師備)는 “바로 그것이 두 번째 달”
            법안 : 모르겠습니다.                                                         이라고 했고 운문문언은 “남종이 여종을 보면 정성스러워

            지장 : 모른다는 그것이 가장 가까운 길이다.                                            진다.”고 했다.
            법안은 이 말에 크게 깨달았다.
                                                                                 부지런히 절 마당을 쓸고 있는 운암을 보고 손위인 도오
            이성 (理性)은 유능하지만 불완전하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                                   가 깐죽거리는 장면이다. 어지간히도 부산을 떤다는 말에
          래는 오지 않았다. 정작 오면 한심하다. 인생은 내게 목숨을                                    운암은 비위가 상했다. “구구하지 않음도 있다”면서 자신의

          주었으나 아무 때나 참견하고 불시에 빼앗아간다. 사랑은 부                                     행위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는 모양새다. 하긴 청소만큼 갸
          재(不在)로써 존재한다. 남은 위험하고 나는 불안하다. 진실                                    륵하고 윤리적인 일도 없으니까. 아쉬운 건 운암이 스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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