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6 - 고경 - 2015년 8월호 Vol.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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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각(乖角)이었던 덕산과의 한판승부를 무사히 치러낸 암두                                        “내가 평소 그에게 이르기를 ‘공겁 (空劫) 이전에 알아차리

          의 용기를 치하했다. 요즘 같으면 쇠고랑이나 차기 십상인                                        라’ 했고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타나시기 전에 알아차리
          호랑이선생님에게 사자새끼 한 마리가 불쑥 찾아와 들이댄                                         라’ 했거늘, 아직 한 개는커녕 반 개도 얻지 못했구나. 그
          격이다. 그런데 만약 여기서 우쭐댔다면 경계(境界)에 휘둘린                                      래가지고서야 당나귀띠 해(驢年, 여년)에나 깨달음을 만나
          꼴이다. 덕산의 법을 이은 암두는, 스승만큼이나 걸출한 ‘독                                      겠군.”
          고다이’였다. 한 손은 들고 한 손은 내린 상태에서 절을 했

          다면? 부자연스러운 절은 결국 불경한 절이다. 들고 있던 손                                      ‘말띠 해’는 있어도 ‘당나귀띠 해’란 없다. 곧 면벽 (面壁)으
          의 가운뎃손가락도 궁금하다.                                                      로는 천년만년이 흘러도 깨달을 수 없다는 질책이다. 그래도
            마음이 시험에 드는 까닭은 뭔가 바라는 것이 있거나 구                                     ‘수행’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대번에 벽을 바라보고 앉아 장

          린 데가 있어서다. 사실 덕산방에 대한 가장 적절한 해법은                                     시간 버티는 이미지가 연상된다. 속세를 떠나 시비에 초연하
          선택이 아니라 반격이다. 웃어른의 으름장에 쫄거나 무엇을                                      겠다는 ‘액션’은 진지하고 멋지다. 한편으론 탈속(脫俗)에 대
          고를까 전전긍긍하는 대신, 그의 몽둥이를 냅다 빼앗아버리                                      한 집착이자 깨달음에 대한 탐욕으로 비친다는 점에서, 고
          는 것이 선가(禪家)의 정석(定石)이다. 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                                  약한 액션이고 재미도 없는 액션이다.
          마저 초월한 만큼 누가 뭐란다고 해서 동요할 내가 아니라                                        사방이 꽉 막힌 벽에 갇히면 다들 괴로워하게 마련이다.

          는 자신감에 근거를 둔다. 물론 그것은 ‘내가 최고’라는 독                                    그런데 도인은 거기서 낙서를 하거나 오줌을 누는 인간이다.
          선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무아(無我)의 정                                   남전의 간덩이는 붓다 못해 딱딱하다. 그의 핀잔은 따로 벽
          신에 힘입은 결기다. 산인 (山人)들은 시험지로 딱지를 접거나                                   을 찾아다닐 일이 아니라, 만물과 만인과 만사가 본래 벽임

          여차하면 그냥 씹어 먹는 자들이다.                                                  을 알아야 한다는 법문으로 들린다.
                                                                                 횡단보도, 나무그늘, 곤욕, 성가신 사람……. 길에서는 문
            【제23칙】                                                             득문득 벽을 만난다. 돌아가거나 기다리거나 가끔 기대어
            노조가 벽을 향하다(魯祖面壁, 노조면벽)                                             쉬면 그만이다. 벽이 고맙다 해서 짊어지고 다니거나, 실망
                                                                               한 마음에 애써 벽을 세울 필요는 없다. 무너뜨리려다 먼저

            노조보운(魯祖寶雲)은 누가 찾아오면 돌아앉곤 했다. 남전                                    무너지기 십상이다. 다들 잊은 것 같은데, 마음은 원래 벽이
            보원 (南泉普願)이 이를 전해 듣고 다음과 같이 꾸짖었다.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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