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 - 고경 - 2015년 11월호 Vol.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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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오는데 내 어찌 전의 허물을 답습하여 입 아프게 이
야기해 주지 않으랴. 그러나 나는 늙었고, 평소 유학에
는 통달치 못했으니 그대를 가르칠 수가 없다. 만송(萬
松) 노인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는 유가와 불도를 겸비하
고 종지와 설법에 모두 정통하시며 걸림 없는 말솜씨를
가지셨다. 그대는 그 스님을 뵙는 것이 좋겠다.
내가 만송 노인을 찾아뵙고 침식을 잊고 지낸 지 거의 3
년이 되었다. 나는 외람되게도 스님의 법은을 입고 자식
야율초재 진영
으로 인가받아 담연거사 종원(湛然居士 從源)이라는 이
름을 얻었다. 그후 다시 칭기스칸의 부름을 받아 행재
이상은 『벽암록』과 『종용록』의 해제를 요약해 보았습니다. 소(行在所)에 나가 호종관(扈從官)으로서 서쪽으로 정벌
『종용록』에 실린 야율초재(119~1243)의 ‘종용암록서’와 담 을 나가게 되었으므로 스님과 몇 천리나 떨어져 있는지
연 거사에게 부치는 편지에 적힌 ‘평창 천동종용암록’에 쓰 도 모른다. 우리 종문에 천동(天童)이라는 분이 있어 송
인 촌로 만송 스님이 쓴 글을 내용으로 『종용록』이 세상에 고(頌古) 100편을 지었는데 그것을 절창(絶唱)이라고 한
나온 인연을 간략히 정리해 봅니다. 다. 나는 만송 노인에게 ‘이 송고에 평창을 붙여 후학을
위해 일깨워 주십사’ 하고 간청하는 편지를 7년을 두고
“야율초재 거사가 금나라가 망하고 물러나 정진을 거듭 전후 아홉 차례나 보냈는데 이제야 답장을 받게 되었다.
하며 징공(澄公) 선사에게 도 구하기를 청하니 징공 스님 …… 경성 (京城)의 사제 종상(從祥)이가 이 책을 세상에
이 조용히 말했다. 펴내서 후학들에게 도움을 주자고 간청하는 편지를 보
지난 날 그대는 요직에 몸담고 있었다. 그리고 유학하는 내 왔다. 그래서 이에 서 (序)를 쓴다.”
사람은 대부분 불서를 깊이 믿지 않고 어록을 뒤적이면
서 말밑천이나 삼으려 하기 때문에 내 감히 수고스럽게 만송 스님은 담연 거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한다.
선가의 매서운 수단을 써주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그대
의 마음을 헤아려 보니, 과연 본분사를 가지고 내게 물 “우리 종문의 설두와 천동은 공자 문하의 자유(子游)와
8 고경 2015. 11.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