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0 - 고경 - 2015년 12월호 Vol.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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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백 년을 살면서 수로학(水老鶴)을 보지 못하면, 가 있던 절강성 (浙江省)에서 나온 것을 ‘제본’으로 불렀던 것
이는 하루를 살면서 그것을 보는 것만 못하네. 으로 보인다. 유청 스님은 이 두 가지 목판인쇄본을 바탕으
若人生百歲 不見水老鶴 로 서너 명의 납자들과 함께 글자를 반복해서 대조하여 『명
不如生一日 時得覩見之 추회요』를 목판에 새겼다고 한다. 이 책을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 동안 원본에서 오자가 발견되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이 게송을 듣고 깜짝 놀란 아난 존자는 자신이 부처님에 못했는데, 이 점만 보더라도 유청 스님이 이 책에 기울인 정
게 들은 게송을 다시 일러 주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은 다 성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음과 같다. 여기서 『종경록』의 목판본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유청 스님이 『명추회요』를 목판으로 간행한
사람이 백 년을 살면서 생멸법 (生滅法)을 이해하지 못하면, 때가 1096년이므로, 스님이 보았던 『종경록』의 두 가지 목
이는 하루를 살면서 그것을 이해하는 것만 못하네. 판본은 이보다 전에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若人生百歲 不解生滅法 『종경록』의 서문을 쓴 양걸 (楊傑)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不如生一日 而得解了之 양걸은 북송 시기의 유명한 관리이자 문인이며 재가불자이
다. 그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종경록』이 처음 나오자 오월
이는 부처님께서 설한 생멸법 (生滅法)을 수로학(水老鶴)으 국(吳越國)의 충의왕(忠懿王)이 직접 서문을 써서 교장(敎藏)
로 잘못 전한 과실을 전하는 고사이다. 에 감추어 두었다고 한다. 즉 세상에 널리 유통시키지 않았
아무튼 『명추회요』가 나온 다음에 이를 베껴 쓰는 과정 다는 말이다.
에서 문제가 생기자, 유청 스님은 아예 이를 목판에 새겨서 이후 송이 중국을 통일한 뒤 신종(神宗)의 시대에 이르러
배포할 마음을 먹게 된다. 목판에 새기면 유통 과정에서 글 황제의 동생인 단헌왕(端獻王)이 원풍(元豐) 연간(1078~1085)
자가 바뀌는 실수는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에 『명추회요』의 에 『종경록』을 목판에 새겼지만, 유명한 사찰에만 나눠주었
제작을 위해 목판으로 인쇄된 『종경록』 두 가지를 구하였다. 으므로 정작 필요한 사람은 보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이때
스님은 이를 경본(京本)과 제본(淛本: 浙江省本)이라고 불렀는 새겨진 것이 바로 『종경록』의 경본(京本)으로 생각되는데, 양
데, 북송(北宋)의 수도인 개봉(開封)에서 나온 『종경록』의 목 걸은 이 목판인쇄본을 먼저 접했던 것으로 보인다. 몇 년 후
판인쇄본을 ‘경본’으로 불렀고, 연수 스님이 활동했던 항주 양걸은 연수 스님이 활동했던 항주 지역에서 그곳 스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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