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 - 고경 - 2016년 2월호 Vol.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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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을 싸고 있었다. 마침 그 절을 찾았던 관찰사 최군(崔郡)은   ● 머리카락 속에 둥지를 틀다

 마조(馬祖) 스님의 제자인 전명여회(傳明如會, 744~823) 선사에  철딱서니 없이 똥을 싸대는 참새와는 달리 들까치는 부드
 게 물었다.    러운 머리카락(고행하느라 삭발조차 잊어버림)을 아예 둥지로 삼
 “참새들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았고 밤에는 그 속에서 잠을 잤다. 보금자리로 안성맞춤이다.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상투를 당기면서 노는 손자처럼 함께 살았다. 그
 “그렇다면 어째서 불두(佛頭)에 똥을 쌉니까?”   공덕으로 까치는 뒷날 나제국(那提國)의 왕으로 태어난다.

 “참새들은 절대로 독수리나 솔개의 대가리에는 똥을 싸지   “내가 선정에 들었을 때 너는 까치가 되어 내 정수리에 새
 않습니다.”   집을 짓고서 오고 가곤 했다. 네가 이렇게 왕이 된 것은 나를
 미물도 자비로움 앞에선 자연스런 행동이 나오지만 무자비  가까이 한 공덕이다.” (『보림전』 권4)

 한 곳에서는 조심하기 마련이라는 의미였다. 이것이 고사성  이 말을 들은 추니왕(芻尼王 : 선종 21조인 바수반두의 아우)은
 어 ‘불두착분(佛頭着糞)’의 전말이다.(『전등록』 권7)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된 일산(햇빛
 불가의 ‘불두착분’ 네 글자는 유가로 넘어가면서 또 다른   및 새똥 방지 겸용)을 선물하면서 새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
 방향으로 재해석되었다. ‘불두’의 청정함과 ‘새똥’의 지저분함  래를 불렀다.
 을 대비시켜 뛰어난 책에 모자라는 서문을 붙인다는 뜻으로

 바뀌었다. 본문자체의 품질이 떨어지는 두찬(杜撰)과는 또 다  내가 옛날에 들까치가 되어 (我昔爲野鵲)
 른 의미였다. 송나라 왕안석 (王安石, 1021~1086)은 구양수(歐  세존의 정수리 위에 머물렀으니(在尊頂上止)
 陽修, 1007~1072)가 저술한 『신오대사(新五代史)』의 서문을 읽  이 칠보로 만든 일산을 바치면서 (奉此七寶蓋)

 고서 ‘뛰어난 책에 함부로 머리말을 붙였다’고 비웃으며 “어찌   전생의 인연에 보답코자 하옵니다. (以答先世耳)
 부처의 머리에 똥을 싸는가(佛頭上豈可着糞)?”라고 개탄한 것
 이다. 그런 까닭에 조선 땅 이황(李滉, 1501~1570) 선생의 『퇴
 계집』에는 서문이 아예 없다. 후학들이 문집을 엮은 후 뛰어
 난 제자 정구(鄭逑, 1543~1620)에게 서문을 부탁하자 “어찌 불  원철 스님  ●          해인사승가대학장이며, 조계종 불학연구소장을 역임했다. 해인사, 은

 두착분 하겠느냐.”라고 사양한 이래 어느 누구도 감히 서문  해사, 실상사, 법주사, 동국대 등에서 경전과 선어록의 연구・번역・강의로 고전의 현대화에
          일조하면서, 일간지 등 여러 매체에 전문성과 대중성을 갖춘 글로서 주변과 소통하고 있다.
 을 달지 못했기 때문이다.   『집으로 가는 길은 어디서라도 멀지않다』외에 몇 권의 산문집과 번역서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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