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9 - 고경 - 2016년 2월호 Vol.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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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것[淨]으로 존재한다고 단정한 뒤 신비화시켜버렸다. 일상 적 용어에 대한 잘못된 견해가 잘못된 수행으로 이어졌고, 더
적으로 우리는 ‘나의 책’, ‘나의 돈’이라는 말 등을 반복해서 나아가 윤회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용하는데, 책이나 돈을 소유한 ‘나’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런데 ‘나의 눈’, ‘나의 몸’이라고 말할 경우, 눈과 몸 ● ‘말’과 ‘실제’ 사이
을 소유한 ‘나’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성도 후 부처님은 우리가 ‘나’라고 여기는 몸[身]・느낌[受]・
이런 물음에 대한 하나의 해답으로 인도의 일인론자들은 마음[心]・법(法)의 네 가지와 몸[色]・느낌[受]・표상[想]・의지
바로 위에서 말한 ‘아트만’을 제시한 것이다. 눈과 코 같은 몸 [行]・의식[識]의 다섯 가지에 대해 그 이름에 대응하는 진정
뚱이를 소유한 ‘아트만’이야말로 진정한 자아이다. 이런 견해 한 ‘나’가 있는 것이 아님을 반복적으로 관찰하게 하셨다. 앞
로 인해 일인론에서는 브라흐만과 아트만이 하나[범아일여梵 의 것이 사념처 (四念處) 수행이고, 뒤의 것이 반야심경에 나
我一如]임을 체험하는 것을 수행의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그 오는 오온개공(五蘊皆空)의 자각이다. 이후 불교도들은 특히
런데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기에는 이 이론은 결국에는 ‘나’에 ‘나’라는 말에 대응하는 ‘아트만’과 같은 것이 실재하지 않음
대한 무지 (無知)에서 비롯된 매우 강력한 독단(獨斷)에 지나 을 꾸준히 관찰했고, 이런 전통은 후대 유식학에 이르러 ‘말
지 않았다. 성도하기 이전의 싯다르타 태자는 저들의 견해에 과 실제’에 대한 보다 정교한 이론으로 정립되게 된다.
따라 선정 (禪定)에 들어가는 체험을 무수히 경험했지만, 선정 그런데 불교도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에서 나오는 순간 다시 ‘나’와 관련된 번뇌가 생기는 것을 막 말과 불교 이외의 종교나 철학에서 쓰는 말은 그것에 대응하
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태자는 이들의 가르침을 ‘선정 는 실제가 없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런 통찰을 보여준 부
과 일상의 상태가 일여 (一如)하지 않은 것’으로 비판하고, 다 처님을 지칭하는 명호에 대해서도 그렇게 봐야 하는지에 대
른 길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해서는 의문이 남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부처님의 명호
이후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 고요히 앉아 연기 (緣起)의 법칙 는 진실한 것이 아닌가? 이를 염두에 두고 『명추회요』 98쪽
을 관(觀)하시고 무상(無上)의 깨달음을 증득하셨다고 한다. 의 문답을 잠시 살펴보자.
즉 모든 중생들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꽉 붙잡고 있
는 ‘나’라는 의식의 밑바닥에 무시이래 (無始以來)의 무지(無知) 【물음】 유심 (唯心)의 오묘한 종지에는 일체가 이름이
와 독단(獨斷)이 자리 잡고 있음을 자각하고, 그로부터 훌쩍 없다면, 중생의 호칭 같은 것이야 거짓으로 시설할 수도
벗어나버리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일인론의 경우, 일상 있겠지만 모든 부처님의 명호를 어찌 헛되이 세웠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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