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4 - 고경 - 2016년 4월호 Vol.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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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해치지 못한다. 진리 이전에, ‘거리’가 우리를 자유롭                                    이다. 엄밀히 말하면 존재의 독자성을 가리킨다. 단도직입적

         게 한다.                                                                 으로, 불성은 자기 자신이다. 누구든 간에 거둬 먹여야 할 또
           망상이 망념이듯 희망도 망념이다. 때로는 망상 속에서 우                                     는 상처받아야 할 ‘나’를 갖는다.
         리는 즐겁다. 망념은 사람다움의 증거이기도 하다. 망념이 민                                       불성을 직시한다는 건 나를 대신할 자는 없음을 아는 것이
         주화를 앞당기고 망념이 벌거벗은 여인들에게 옷을 입힌다.                                       다. 단순하지만, 자못 허탈하지만, 절대적인 사실이다. 아무리
         망념은 정말 유용하다. 어떤 망념이 자신을 괴롭힐 때 또 다                                     위대한 성현이라도, 심지어 부처님이라도, 나를 대신 살아주

         른 망념을 만들어 거기에 숨으면, 한동안 쉴 수 있다. 화두에                                    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행복을 원한다면, ‘나’를 살아야 한다.
         집중하면 화병 (火病)이 뚝 떨어지는 이치다.                                             “남들처럼만 남들만큼만 살라.”는 훈계는, 따지고 보면 죽으
           망념 (妄念)은 ‘있다 없다’ ‘살았다 죽었다’ ‘좋다 나쁘다’ ‘옳                              라는 저주다. 나답게 살게 되면 공부는 끝난다. 부처이기 때

         다 그르다’ 등등의 허망한 생각. 마치 흐르는 물을 움켜쥐려                                     문이다.
         는 꼴이다. 그냥 마시면 된다. 실체는 없으나 묘용(妙用)으로                                      결국 관건은 ‘무엇이 나답게 사느냐’는 건데, 역설적으로
         서 빛나는 공(空). 물이 몸속 어디로 갔든, 시원하구나.                                      ‘나’를 내버려둘 때에 비로소 ‘나’를 지킬 수 있다. 세상 돌아
                                                                               가는 꼬락서니가 그렇다. ‘나’를 돋보이려는 마음이 모략을 일
           ●                                                                   삼고 추태로 허송세월한다. ‘나’를 날 세우려는 힘이 끝내는

           제46칙                                                                ‘나’를 향한 칼끝으로 돌아오게 마련이다. ‘하고 싶은 일’이 아

           덕산이 배움을 마치다(德山學畢, 덕산학필)                                             니라 ‘할 수 있는 일’이 나의 운명임을 깨닫게 되려면 오랜 세
                                                                               월이 걸린다. 그 어떤 군더더기 없이 ‘그냥’ 사는 게, 부처의

            덕산원명(德山圓明)이 대중에게 일렀다. “공부를 마칠 무                                    삶이다.
            렵에 이르면 삼세 (三世)의 부처님들이 당장에 입을 벽에                                      남에게 손을 벌리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직장에 붙어있어야
            다 건다. 오직 한 사람만이 깔깔거리며 웃나니, 만일 이                                    한다. 나의 밥벌이는, 굴욕적이어도 주체적이다.
            사람을 안다면 공부는 끝난 것이다.”



           ‘모든 중생은 불성 (佛性)을 가지고 있다.’ 불교의 근본적인                                    ※ 덕산 연밀(德山緣密, ?~?)   송대(宋代) 스님. “도는 호떡” “날마다 좋은
         전제다. 으레 이웃을 향한 자비의 수사(修辭)로 활용되는 말                                       날” 등의 화두를 남긴 운문 문언(雲門文偃)의 법을 이었다. 시호가 원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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