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5 - 고경 - 2016년 5월호 Vol.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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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성 스님은 특히 대각사에서 윤봉길 의사에게 삼귀의 (三
          歸依)와 오계(五戒)를 줬고, 상해 임시정부에 가서 항일독립
          운동을 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용성 스님 열반 후 대각사를
          찾은 김구 선생은 “용성 큰스님께서는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
          주시어 나라의 광복을 맞이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셨다. 뿐만
          아니라 매헌 윤봉길 의사를 보내주시어 만대의 순국의 사표

          가 되도록 해 주셨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후 대각사에 ‘대각교당’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당시 친일
          적 색채가 짙어가던 불교 정화에 주력했다. 대각교 운동은 사

          회개혁과 민족정기 승화에 연결되어 한국사회에 역사적 전환
          을 가져오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스님은 『조선
   성철스님기념관 내 조사전 모습
          글 화엄경』을 비롯해 30여 종의 경전을 우리말로 옮겼고, 한
 님도 함께 모셨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주셨습니다. 큰스님 선  문으로 된 불교의식도 한글화 했다.
 양 사업을 하면서 용성, 동산 두 큰스님도 더 잘 모셨으면 하  용성 스님은 성철 스님과도 인연이 있었다. 출가 직후 스승

 는 고민을 하던 차에 이렇게 진영을 함께 모시면 좋을 것 같  인 동산 스님을 따라 부산 범어사 금어선원에서 하안거 한
 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실무를 도와준 원암 스님과 우리 문  철을 난 성철 스님은 범어사 내원암으로 가서 용성 스님을 시
 도스님들께 감사를 드리고 항상 마음을 써 주시는 불자님들  봉했다. 용성 스님은 다른 스님들을 모두 선생이라 불렀는데,

 께도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손자뻘인 성철 스님에게만은 꼭 ‘성철 수좌’, ‘성철 스님’이라
 근현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선지식 (善知識) 용성, 동산, 성  불렀다고 한다.
 철 스님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스님이라고 부를 만한 중이 있어야지. 그런데 너를 대하니
 용성 스님 (1864~1940)은 설명이 필요 없는 ‘대조사’다. 스님  스님이라고 부를 만하다는 생각이 들어. 앞으로 참선 정진
 은 16세 때 합천 해인사에서 출가했다. 3·1운동 때는 독립선  열심히 해라.”

 언서에 서명하고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불교계 대표  용성 스님이 범어사에서 서울 대각사로 주석처를 옮겨가면
 로 참여했다가 3년여 간의 옥고를 치렀다.   서 성철 스님은 용성 스님 시봉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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