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4 - 고경 - 2016년 7월호 Vol.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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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 굶으면 영 비실거리게 마련이다. 또한 밥이 되어야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고, 영원이란 관념은 ‘유한하다’는 감정에서 비

         밥을 먹을 수 있다. 그리하여 찬밥 무시하지 마라. 세상의 근                                    롯되는 것이다. 장단(長短), 고저(高低), 시비(是非), 선악(善惡),
         본이다. 끼니때를 기다리는 일은 부처님을 모시는 일이다. 밥                                     미추(美醜), 빈부(貧富), 승속(僧俗), 노소(老少)도 마찬가지다.
         먹기 어려운 줄을 알아야 참으로 어른이다. 밥벌이는, 순례다.                                    상대가 있어야만 비로소 설 수 있다. 어둠이 있기에 빛이 있
                                                                               는 것이고, 그림자가 없으면 빛도 대접받지 못한다. 사방이 온
           ●                                                                   통 빛으로 가득하면, 눈이 먼다.
           제56칙                                                                  중도(中道)란 가운데이기도 하지만, ‘섞음’이기도 하다. 모순

           밀사의 흰 토끼(密師白兎, 밀사백토)                                                된 양변을 하나로 통합할 줄 아는 시선이다. 어느 한편에 치
                                                                               우치게 되면 결국 어느 한편을 편들게 되고, 결국 세상의 정

            밀사백(密師伯)이 동산 양개(洞山 良介)와 함께 길을 떠났                                   의와 미덕을 그르치고 만다. 중도여야만 마음이 넉넉해지고
            다. 갑자기 흰 토끼가 쏜살같이 눈앞을 달려 지나갔다. 밀                                   슬기로워지며…, 무엇보다 그래야만 모순을 견딜 수 있다. ‘벼
            사백이 감탄했다. “날쌔구나!” 동산이 은근히 법력을 떠                                    락출세’는 이미 처절한 추락을 예비하고 있다. 낙담하지 말고
            보았다. “어떻습니까?” “마치 백의 (白衣)가 졸지에 재상                                  때를 기다려야 한다.
            에 오른 격이로구나.” 동산이 비꼬았다. “너무 거만하신데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어쩌면 저토록 무시무시한 근면과
            요.” 밀사가 물었다. “그렇다면 자네의 생각은 어떠한가?”                                  계략을 짜낼 수 있나 싶은 사람을 종종 발견한다. 대개 딸린

            동산이 말했다. “여러 대 (代)의 번영이 순식간에 몰락해                                   식솔이 많다. 부처님 가피력보다 센 것이 생존력 같다. 한편
            버렸습니다.”                                                            생존력이 무슨 짓이든 하게 만드는 힘이라면, 무기력은 아무
                                                                               것도 못하게 압박하는 힘이다.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때에는,
           조사들은 대법 (對法)의 설법을 펼쳤다. 어떤 개념의 의미를,                                  아무 일이라도 해서 우울증을 탈출해야 한다. 그리하여 중도
         그와 정반대인 개념을 드러내 설명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상                                     는 일견 집중력이고…, 몸부림일 수도 있겠다.
         (常)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무상(無常)이 상”이라고 했고(하택
         신회), “무위(無爲)가 무엇이냐?”는 질문엔 “유위(有爲)”라고 맞

         받아쳤다(대주 혜해). 동문서답이니, 묻는 입장에선 매우 난감                                    장웅연    ●          집필노동자.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2002년부터 불교계에서
         하다.                                                                   일하고 있다. ‘장영섭’이란 본명으로 『길 위의 절』, 『눈부시지만, 가짜』, 『공부하지 마라』, 『떠
                                                                               나면 그만인데』, 『그냥, 살라』, 『불행하라 오로지 달마처럼』 등의 책을 냈다. 최근작은 『한국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있음’은 ‘없음’이라는 개념에 의해                                   인이 가장 좋아하는 선문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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