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0 - 고경 - 2016년 9월호 Vol.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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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더 궁금해졌다. 시간은 중천 스님의 출가로 되돌려졌다.
“저는 사실 불교에 문외한이었어요. 고향 집 주변에 절은
많았지만 그리 큰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성년이 되어
군대를 갔는데 그곳에는 정말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이 있었
습니다. 여러 사람들을 보면서 삶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
어요. 그러던 중 불교에 답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대
를 하고 출가를 본격적으로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해인사, 쌍
계사, 다솔사 주지스님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제일 먼저 답장
을 주신 분이 다솔사 주지 최범술 스님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쌍계사 주지스님의 답장이 왔습니다. 고심 끝에 다솔사로 갔
칠불보궁에 모셔진 용성 조사와 십이제자 진영 습니다. 최범술 스님은 제헌 국회의원에 박학다식한 학자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솔사에 가 보니 제가 생각하
“용성 조사님은 우리 불교의 큰어른이십니다. 그런데 스님 던 불교의 모습이 아니었어요. 최범술 스님은 머리를 기른 대
들도 용탑선원이 어떤 곳인지를 잘 몰라요. 그래서 현재 법손 처승이었거든요. 하루는 제가 ‘스님은 왜 머리를 기르고 있습
이 있는 용성 스님의 제자들을 한 자리에 모셨습니다. 그렇게 니까?’라고 여쭈니 ‘법당에 부처님은 머리가 있어? 없어?’라
한 분 두 분 모시다 보니 열두 분이 됐습니다. 이렇게 스승과 고 되물으셨습니다. 조금 낙담해 있던 차에 다솔사 인근 토굴
제자들의 진영을 함께 모셔 놓은 곳은 없습니다. 에 살던 한 스님이 해인사 용탑선원을 추천해 주셨습니다. 용
함께 모신 김에 합동다례를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매년 음 탑선원 고암 큰스님을 찾아가라고 해 그 길로 짐을 싸서 이곳
력 9월 10일에 다례를 올리는데 그 날 용성 스님의 법손들이 에 왔습니다.”
한 자리에 모입니다. 용성 큰스님을 문중의 후손들이 함께 추 스님은 1963년에 용탑선원에 왔다. 행자생활을 거쳐 사미
모하고 또 그 가르침을 되새길 수 있어 참 좋습니다.” 계를 먼저 수(受)하고 나중에 받은 법명이 ‘중천(中天)’이었다.
용성 스님의 생 (生) 사리가 나와 세워진 용탑선원이 문도들 스님은 용탑선원에서 고암 스님을 모시며 해인사 강원을
의 구심점으로서 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중천 스님의 원력 다녔다. ‘통학’을 했던 셈이다. 스님이 학인이던 시절에 해인사
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래서 중천 스님과 용탑선원의 인연 는 해인총림이 되었고 많은 대중들이 모여들었다.
18 고경 2016. 09.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