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3 - 고경 - 2017년 2월호 Vol. 46
P. 53
계가 결국은 나를 먹여 살린다. 나만 돋우려니까 밟히고 나만
밝히니까 어두워진다. 원수를 구워삶을 줄 알아야 내게도 숨
통이 트이는 법이다. 어쨌든 죽음이듯, 개똥도 약에 쓰듯, 수
용하고 이용하자.
제75칙 — ●
서암의 항상한 이치(瑞巖常理, 서암상리)
서암사언(瑞巖師彦)이 암두전활(巖頭全豁)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근본답게 항상(恒常)한 이치입니까?”
“움직였다.”
“움직이지 않을 때는 어떠합니까?”
“근본답게 항상한 이치를 보지 못했느냐?”
이해하지 못한 서암이 생각에 잠겼다. 암두가 말했다. 그렇다고 도가 없다고 부정해버리면 인간의 저속화를 야기
“긍정하면 근진(根塵)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 부정하면 생사 한다. 모두가 개처럼 벌면서 헐떡이는 세상은 아무리 빌딩숲
를 면치 못할 것이다.” 이 드높고 첨단기술이 날뛴다손, 개판이고 야만이다.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리라”는 선언은 그나마
“진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들으면 으레 우리는 진리를 이승을 인간의 세상으로 버티게 하는 힘이다. 차라리 안다고
‘떠올린다’ 고귀하고 신성한 어떤 것을 궁구하면서 성상(聖像) 믿는 자들의 오만이, 아예 모르기로 한 자들의 방탕보다는 낫
이나 고론(高論)에 대입한다. 그러나 도(道)라는 생각이 도는 다. 최소한 범죄율은 떨어질 것이다.
아니다. ‘도가 있다’라고 긍정한다면 ‘도가 있다’는 생각에 얽 여하튼 도가 ‘있다’고 하면 망상이고 도가 ‘없다’고 하면 악
매인 것이다. 근진 (根塵)이란 6근이란 감각기관과 6진이란 감 행인 이 상황을 어찌할 것인가. 어쩌긴. 누가 몇 모금 퍼마셨
각대상의 총합이다. 사람은 자기가 본 만큼만 안다. 안다고 믿 다고 오줌 좀 눴다고 어떻게 될 강물이던가. 정 아쉽다면, 생
고 안다고 떠든다. 각을 멈추면 되고, 군말 없이 죽어주면 되지.
● 고경 2017. 02. 50 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