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4 - 고경 - 2017년 2월호 Vol.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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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칙 — ● 야구계의 수순을 선 (禪)에 대입할 경우에도 묘하게 맞아떨
수산의 세 구절(首山三句, 수산삼구) 어진다. 타자 입장에선 초구에 승부를 보는 게 여러모로 깔끔
하다. 초구 스트라이크를 그대로 흘려보낼 경우 일단 골치가
수산(首山)이 대중에게 일렀다. 아프다. 투수가 다시 스트라이크를 던질까 유인구로 속일까
“제1구에서 깨달으면 불조(佛祖)의 스승이 될 만하고 제2구에서 전전긍긍. 앞서 말한 대로 투 스트라이크면 벼랑에 몰린다. 그
깨달으면 인천(人天)의 스승이 될 만하다. 제3구에서 깨달으면 러니 번뇌에 허덕이고 싶지 않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스
자기 자신도 구제하기 어렵다.” 트라이크일 가능성이 높은 초구에 자신감 있게 대응하는 게
어떤 승려가 물었다. 낫다.
“화상께서는 몇 번째 구절에서 깨달으셨습니까?” 그렇다고 기막히게 공이 잘 맞아도 탈이다. 오히려 타구가
수산이 대답했다. 너무 빨라서 주자가 있을 때엔 병살을 당하기 십상이다. 다만
“달이 저물면서 삼경(三更)의 저잣거리를 가로질러 지났느니라.” 우물쭈물거리다 삼진을 당할 바에야, 호쾌하게 휘두르는 방망
이가 더욱 볼 만하다. 신중하게 처신한답시고 기회를 날려버
개인적으로 메이저리그 마니아다. 수많은 규칙과 전술이 있 리는 것뿐. 실제로 초구 타율은 타자들의 평균 타율보다 높은
으나 야구는 근본적으로 스트라이크와 볼 사이의 확률게임 편이다. 물론 허망하게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타순은 돌아가
이다. 통계적으로 초구 스트라이크는 타자에게 절대적으로 고 경기는 내일도 열린다.
불리하다. 초구가 스트라이크면 평균 타율은 1할 가까이 떨어
진다. 더구나 투 스트라이크 노 볼의 상황에선 제아무리 교타 제77칙 — ●
자라도 2할 이상을 치기가 버겁다. 앙산의 조금(仰山隨分, 앙산수분)
반면 투 볼 노 스트라이크나 쓰리 볼 원 스트라이크 등 타
자 쪽으로 볼카운트가 몰리면 처지는 반대가 된다. 스트라이 어떤 승려가 앙산에게 물었다.
크를 반드시 넣어야 하는 투수는 웬만하면 변화구보다 컨트 “화상께서는 글자를 아십니까?”
롤이 쉬운 직구를 던지게 마련이다. 동시에 타자는 그만큼 구 “조금(隨分).”
질을 예상하고 때리기가 수월하다. 그래서 초구는 꼭 스트라 승려가 오른쪽으로 한 바퀴 돌며 물었다.
이크를 넣으라는 게 투수 팀 코치진의 보편적인 주문이다. “이것은 무슨 글자입니까?”
● 고경 2017. 02. 52 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