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4 - 고경 - 2017년 3월호 Vol. 47
P. 54
“어찌하면 그럴 수 있습니까?” 는 하등의 쓸모가 없는데도, 존재한다. 오래 전 티베트불교를
“낭주(郎州)의 산과 풍주(灃州)의 물이니라.” 소재로 한 영화의 마지막 대사가 잊히지 않는다. ‘마지막 남은
“뭔 소리랍니까?” 한 방울의 물을 지키고 싶다면? 바다에 던져버리면 되지.’ .
“사해(四海)와 오호(五湖)가 왕의 덕화 속에 있느니라.”
제80칙 — ●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천길 벼랑 끝에서 한 걸음 용아가 판때기를 건네다(龍牙過板, 용아과판)
더 나아가야 깨달을 수 있다는 뜻이다. “딴 것이 있을 수 없
다”는 회 (會)의 답변은 절반의 깨달음이다. 용아거둔(龍牙居遁)이 취미무학(翠微無學)에게 물었다.
딴 것이 없다고는 했지만 ‘딴 것’이라는 분별심에 빠져 있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
는 상태가 아닐는지. 벼랑 끝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떨어지는 취미가 말했다.
것뿐이다. 그래야 비로소 세계가 나와 한 몸이 된다. 죽어서 “나에게 선판(禪板)을 다오.”
의 나는 속리산의 나무나 시화호의 쓰레기가 되어 있을 것이 용아가 집어서 취미에게 건네주니 취미가 들입다 선판으로 용
다. ‘나’라고 하는 집착만 버리면 어디든 살 만한 곳이다. 나무 아를 때렸다. 용아가 말했다.
는 도망갈 발이 없고 떠들어댈 입이 없어도 잘만 산다. 쓰레기 “때리기야 스승님 마음이겠소만 아직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없소이다.”
이번엔 임제(臨濟義玄)에게 가서 똑같이 물었다.
“나에게 포단(蒲團)을 다오.”
임제가 받자마자 때렸다.
“아직도 서쪽에서 오신 뜻이 없어요.”
훗날 용아가 어느 절의 주지를 맡았는데 누가 물었다.
“두 어른의 눈이 밝던가요?”
“밝히기는 밝혔으나 아직 오신 뜻은 없다.”
선판(禪板)이란 오래 좌선을 하고 지칠 때 등에 기대어 쉴
● 고경 2017. 03. 52 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