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8 - 고경 - 2017년 3월호 Vol. 47
P. 58
선사, 주인공의 삶
한참 기다린 터라 해는 점점 기울어 가는데 만나기로 한 친구
는 나타나지 않았다. 친구 집에 전화를 해보고서야 급한 일이
새해를 백팔배로 생겨 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집으로 돌아가기는 늦었
시작하며 고 그렇다고 혼자 아무데서나 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난감
했다. 머리를 굴려 도움청할 사람을 생각해 보았으나 해인사
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원택 스님 뿐이었다. 그러나 원영 스님
글 : 이인혜
소개로 인사한 지 얼마 안 된 사이라, 무턱대고 찾아가면 실
례가 되지나 않을까 걱정되었다. 망설이는 동안 아까운 시간
만 흘려보내고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어지자 저절로 용기
가 나서 팻말을 보고 백련암을 찾아갔다.
마당을 지나는 한 스님께 원택 스님을 찾아왔다고 하자 안
나는 절을 수행삼아 해본 적이 없다. 대학 때 수련회 갔다 내해주었다. 스님께선 예고 없이 찾아간 불청객을 반갑게 맞
가 일정에 따라 백팔배를 몇 번 해보았으나 그때마다 별로였 아주셨다. 일 없이 찾아간 터라 무슨 일로 왔느냐고 하면 뭐
다. 절보다 재밌는 게 많았던 때라 그런지, 몸은 괴롭고 시간 라고 대답할까, 올라가는 동안 궁리를 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
은 아까웠다. 그 뒤로 어쩌다 절에 가서 예불할 때 말고는 절 어 이실직고 했다. “지나가는 과객이온데 하룻밤만….” 스님은
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지냈다. 그러던 것이 올해는 신년벽두 여자들 방으로 데려다주며, “그럼 편히 쉬십시오.” 하는 간단
를 백팔배로 시작하여 작심삼일을 훌쩍 넘기고 한 달 반이 한 인사와 함께 사라지셨다. 그러나 그날 밤, 편히 쉬지 못했
지났다. 이제는 아침마다 절하는 시간이 은근히 기다려지기 다. 목례를 하고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았는데 어쩐지 긴
도 한다. 절을 시작하고 나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 기억이 하나 장감이 돌았다. 절을 하러 온 신도들이 채비를 하고 있었는데
떠올랐다. 나도 옛날에 백련암에서 무려 삼천배를 한 적이 있 말없는 동작에서 느껴지는 공기가 심상치 않았다. 나는 절하
다는 사실. 딱 한번이었다. 러 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선을 방바닥에 꽂고 시간이 가기
1987년쯤으로 기억된다. 경상도 친구와 여행계획을 잡고 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차츰차츰 분위기에 압도되어 삼천배를
우선 해인사 큰법당 마당에서 만나기로 했다가 바람맞았다. 꼭 해야만 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대열에 끼자니 해낼 수
서울에서 떠나 해인사에 도착하고 보니 벌써 늦은 오후였다.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렇다고 남들 다 절하는 수행처에 와
● 고경 2017. 03. 56 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