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4 - 고경 - 2017년 4월호 Vol.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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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은 네 가지 논리적 단계로 설명되어 있다. 첫째 공으

         로써 유를 부정함, 둘째 유로써 공을 부정함, 셋째 공과 유가
         함께 사라짐, 넷째 공과 유가 함께 존재함이 그것이다.
           첫째 공으로써 유를 빼앗는 것 [空全奪有]이다. 중생의 번뇌
         와 고통은 ‘무엇이 있다’는 집착에서 비롯된다. 욕망하는 주체
         로서 내가 있고, 타자에 의해 상처 받는 내가 있고, 욕망할 대

         상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존재에 대한 이와 같은 관점에서 나
         에 대한 애착이 생기고, 대상에 대한 욕망이 생겨난다. 삶이
         끝없는 욕망을 향해 질주하는 것은 이와 같은 주관과 객관에

         대한 왜곡된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첫 번째 단계는
         나와 대상은 공한 것임을 철저히 깨닫는 것이다. 잘못된 믿음
         이 깨지면 그것에 근거한 집착도 해소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몸에 좋은 양약이라도 지나치면 독약이 된다. 손에 묻은 때를
         실체라고 믿고, 실재라고 보는 나와 대상이 관계적 맥락에 불                                     씻기 위해 비누를 썼지만 비누를 몸에 바르고 있으면 독이 된

         과함을 깨닫게 되면 우리가 믿었던 존재들은 텅 빈 공이 되                                      다. 강을 건너가기 위해 뗏목이 필요하지만 강을 건넌 뒤에도
         고, 실체 없는 무만 존재한다[有空而無有]. 존재의 실상이 텅 비                                  뗏목을 매고 다니면 뗏목 자체가 장애물이 된다.
         어 있음을 깨닫게 되면 당연히 나와 대상이 존재한다는 왜곡                                        따라서 공이 집착을 치료하는 약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공

         된 유견이 사라지게 된다[有見蕩盡]. 나와 객관이 존재한다는                                     으로만 바라보면 공병 (空病)이라는 또 다른 병에 빠진다. 공병
         유견이 사라지면 그에 대한 집착도 사라지고, 집착이 사라지                                      에 걸리면 노력할 일도 없고, 성실히 살아갈 이유도 없고, 선
         면 고통도 사라진다. 철저한 부정을 통해 그릇된 인식을 깨고,                                    행을 베풀 필요도 없는 허무론에 빠진다. 이런 사유는 모든
         집착에서 오는 고통을 치료하는 것이 공유교철의 첫 번째 가                                      것이 공허하다는 극단적 견해이므로 ‘단멸공(斷滅空)’이라고
         르침이다.                                                                 하고, 공을 왜곡하여 잘못된 길로 빠지게 함으로 ‘악취공(惡取

           둘째는 유로써 공을 완전히 빼앗는 것 [以有全奪空]이다. 공                                   空)’이라고 한다. 따라서 공관으로 유견에서 오는 집착을 극복
         은 존재에 대한 집착을 끊는 최고의 양약이다. 그러나 아무리                                     했다면 다음 단계는 비눗물을 씻어야 하고, 뗏목을 버려야 한



         ● 고경                                           2017. 04.                                                                32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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