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6 - 고경 - 2017년 4월호 Vol.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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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것이 바로 유로서 다시 공을 빼앗는 두 번째 치료약이 그러나 여기서 공과 유는 처음의 공과 유와는 차원이 다르
다. 실상은 공이지만 눈앞에 펼쳐져 있는 가상으로서의 유는 다. 유를 보되 유에 집착하지 않고, 공을 보되 허무주의에 빠
분명히 존재한다. 개체적 실체는 없지만 관계 속에서 삼라만 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공과 유에 대한 그릇
상은 존재한다. 이런 이치를 깨닫게 되면 공에 대한 집착도 사 된 생각은 모두 사라진다[非見咸泯]. 그릇된 견해가 사라지면
라진다[空執都亡]. 공도 오롯이 존재하고, 유도 오롯이 존재하는 쌍존(雙存)이 된
셋째는 공과 유라는 두 가지 극단적 견해가 모두 사라짐 [雙 다. 모든 것이 드러나는 절대긍정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見俱離]이다. 공의 눈으로 보면 유가 없고, 유의 눈으로 보면
공이 사라진다. 여기서 공과 유라는 대립적 변견은 모두 해체 구슬 같은 중도의 지혜
된다. 그 이유는 공과 유가 서로 침투[空有卽入]하여 유는 공 공유교철의 이치를 깨닫게 되면 유를 보아도 유에 속박되
속으로 들어가고, 공은 유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공과 유 지 않고, 공을 보아도 허무에 빠지지 않는다. 이런 경지에 대
가 서로 침투해서 상호 소통하고, 전체가 통하여 하나로 소통 해 법장은 “둥근 구슬[圓珠]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듯 모든
하면 [全體交徹] 모든 것은 공하다는 견해도 사라지고, 모든 것 견해에 구속받지 않으며, 자성의 바다를 마음[心端]에서 증득
은 실재한다는 견해도 사라진다. 하여 사물 밖에서 한가하다[逍然物外].”고 표현했다.
이 경지에 이르면 공을 보아도 그 속에서 유를 볼 줄 알고, 법의 실상을 알고, 중도의 이치를 바로 보면 온갖 괴각(乖
유를 보아도 그 속에서 공을 볼 줄 안다. 공과 유라는 대립적 角)과 모난 견해들이 사라진다. 법장은 그런 지혜를 ‘둥근 구
인식은 사라지고 모든 존재는 하나[一相無二]라는 것을 깨닫기 슬’로 비유했다. 모나지 않고 걸림 없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둥
때문이다. 대립하는 두 견해가 모두 사라지는 쌍민 (雙泯)은 절 근 구슬이 걸림 없듯 갖가지 견해와 주장에 걸림이 없는[諸見
대부정이 되는데, 절대부정은 절대긍정과 상통한다. 不拘] 자유로운 인식을 갖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둥근 구슬
넷째는 공과 유가 함께 존재함[兩相雙存]이다. 실상의 눈으 은 모든 차별과 변견이 사라진 중도의 지혜를 상징한다. 차별
로 보면 공과 유가 걸림 없이 서로 소통한다[交徹無礙]. 그렇다 된 견해와 치우친 편견은 모난 것이다. 그러나 중도의 눈으로
고 공이 완전히 사라져 유가 되고, 유가 완전히 사라져 공이 보면 그런 모서리가 모두 사라진다. 우리가 추구할 마음의 상
되는 것은 아니다. 공은 공대로 여전히 존재하고, 유 역시 유 태는 바로 이 둥근 구슬처럼 온갖 선입견과 편견에서 벗어나
대로 각자의 독자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공이나 유라는 두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개념은 무너지지 않고[不壞] 각자의 고유한 성품을 유지한다. 일직선이 있으면 끝과 중간이 있고, 평면이 있으면 변방과
● 고경 2017. 04. 34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