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5 - 고경 - 2017년 4월호 Vol.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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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은 네 가지 논리적 단계로 설명되어 있다. 첫째 공으
로써 유를 부정함, 둘째 유로써 공을 부정함, 셋째 공과 유가
함께 사라짐, 넷째 공과 유가 함께 존재함이 그것이다.
첫째 공으로써 유를 빼앗는 것 [空全奪有]이다. 중생의 번뇌
와 고통은 ‘무엇이 있다’는 집착에서 비롯된다. 욕망하는 주체
로서 내가 있고, 타자에 의해 상처 받는 내가 있고, 욕망할 대
상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존재에 대한 이와 같은 관점에서 나
에 대한 애착이 생기고, 대상에 대한 욕망이 생겨난다. 삶이
끝없는 욕망을 향해 질주하는 것은 이와 같은 주관과 객관에
대한 왜곡된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첫 번째 단계는
나와 대상은 공한 것임을 철저히 깨닫는 것이다. 잘못된 믿음
이 깨지면 그것에 근거한 집착도 해소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몸에 좋은 양약이라도 지나치면 독약이 된다. 손에 묻은 때를
실체라고 믿고, 실재라고 보는 나와 대상이 관계적 맥락에 불 씻기 위해 비누를 썼지만 비누를 몸에 바르고 있으면 독이 된
과함을 깨닫게 되면 우리가 믿었던 존재들은 텅 빈 공이 되 다. 강을 건너가기 위해 뗏목이 필요하지만 강을 건넌 뒤에도
고, 실체 없는 무만 존재한다[有空而無有]. 존재의 실상이 텅 비 뗏목을 매고 다니면 뗏목 자체가 장애물이 된다.
어 있음을 깨닫게 되면 당연히 나와 대상이 존재한다는 왜곡 따라서 공이 집착을 치료하는 약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공
된 유견이 사라지게 된다[有見蕩盡]. 나와 객관이 존재한다는 으로만 바라보면 공병 (空病)이라는 또 다른 병에 빠진다. 공병
유견이 사라지면 그에 대한 집착도 사라지고, 집착이 사라지 에 걸리면 노력할 일도 없고, 성실히 살아갈 이유도 없고, 선
면 고통도 사라진다. 철저한 부정을 통해 그릇된 인식을 깨고, 행을 베풀 필요도 없는 허무론에 빠진다. 이런 사유는 모든
집착에서 오는 고통을 치료하는 것이 공유교철의 첫 번째 가 것이 공허하다는 극단적 견해이므로 ‘단멸공(斷滅空)’이라고
르침이다. 하고, 공을 왜곡하여 잘못된 길로 빠지게 함으로 ‘악취공(惡取
둘째는 유로써 공을 완전히 빼앗는 것 [以有全奪空]이다. 공 空)’이라고 한다. 따라서 공관으로 유견에서 오는 집착을 극복
은 존재에 대한 집착을 끊는 최고의 양약이다. 그러나 아무리 했다면 다음 단계는 비눗물을 씻어야 하고, 뗏목을 버려야 한
● 고경 2017. 04. 32 33